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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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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형제들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호는 우당 본관은 경주 이씨.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직계 10대손이다.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바로 아래 동생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조선 후기에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민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이화영의 며느리는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외동딸, 즉 고종의 조카딸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여성의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특히나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던 우당 선생의 가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이것을 폐풍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행동했던 선생의 선진적인 면모를 볼수 있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6형제 모두가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이집안의 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전 재산 급처했더니 당시 소 13,000마리 갑이다. 당시 40만원이었으며, 현재 시세로 환산했을 때 600억 원 정도이다.

 

또한 소 값이 현재, 과거에 비해 평가절하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한국이 그 당시에는 전세계에서 돈이 많은 나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은 나라였음을 감안한다면(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중 하나이다) 상상 이상의 돈이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급히 처분한 재산이다. 게다가 다 팔지도 못하고 일부는 버리고 갔다. 그러나 이 재산도 독립운동 8년 만에 바닥나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세 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하니 국외 독립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 준다.

 

 

또한 형제인 둘째 이석영 선생은 고종 때 최고 갑부의 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오늘날의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묘원을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 인근에 있는 집이었다고 하한다. 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및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정도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선생은 1934년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본래 이화영 일가는 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였기에 , 한일 병합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경우 일제에게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딱 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구권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술국치 전에는 신민회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경술국치 직후 만주로 이주해 현지의 한인 단체와 신흥강습소 건립에 참여했고, 이후 국내와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도 다수 참여했으며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대개 무장 투쟁파들이 그렇듯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내부분열 시 조정 역을 맡은 적도 있으나, 1921년 노선 불만의 문제로 합류하였다. 이후 만인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는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남화연맹 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체를 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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