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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 흑금성 사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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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흑금성 사건에 대해서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공작원인 흑금성이 북한에서 공작 활동을 하던 중 총풍사건과 관련하여 실체가 탄로난 사건

 

 

흑금성의 본명은 '박채서'로 1954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3사관학교를 거쳐서 국군정보사령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91년부터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의 한미 합동공작대 a-23팀에서 대북 우회 침투 공작에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북한 공작조직이 당면한 자금난을 이용하는 공작안을 기획했는 이것이 상부에 의 채택되었다. 

 

그래서 그는 곧 유능한 엘리트에서 무능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180도 바뀌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고도 제대로 갚지 않아서 신용불량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런 행위는 감찰에 걸리고 말아 결국 1993년 3월 그는 소령 신분으로 제대하고 만다. 

 

하지만 이모든 것은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박채서는 안기부 203실 공작원이 되어 대북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참여한 공작은 '편승공작'으로 대북사업에 열의가 있는 사업가를 지원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방식으로 대북활동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박기영,박채서,정진호

 

그런 박채서 공작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광고 프로듀서 출신의 박기영이었다. 박채서는 먼저 박기영의 이웃집으로 이사를 간후 박기영과의 친분 쌓기에 주력했다. 그리하여 박기영이 한국 광고를 북한에서 촬영하려는 방안을 꿈꾹꾸고 있음을 알아냈다. 박채서는 박기영과 함께 그 방방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본을 물색하던 중 미진양행, 운영자 정진호와 접촉했다. 그리하여 박채서, 박기영,정진호는 1995년 '커뮤니케이션 아자' 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박기영은 대표를 ,박채서는 전무를 각각 맡았다. 

 

한편 박채서는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점차 북한과도 접촉을 시작하였다. 회사 설립 이전에는 조총련계를 통하여 북한 국가보위부장 대리인 김명윤과 접촉하였다.  이때 박채서는 북한의 다른 정보기관들이 제안한 거래를 거부하고 오직 국가보위부하고만 거래를 이어나갔다. 이로서 국가보위부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북한 관련 정보도 어느정도 파악할수 있었다. 회사 설립 전후에는 광명성경제연합회 베이징 대표부의 '리철운,혹은 리호남 이라는 사람과 접촉하였다. 그리고 '흑금성' 박채서는 북한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나 내밀었다. 

 

흑금성이 내민 제안은 바로 '광고 촬영'이었다. 그는 광고 촬영이 북한에게 돈을 가져다 줄것이라며 구슬렸다. 당시 북한은 90년대부터 동구권의 붕괴, 제1차 핵위기 ,자연재해, 고난의 행군 등의 사건들을 겪으며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북한 지도부는 그런 흑금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97년 2월 박채서는 리철과 함께 남북한의 관계자들을 끌어 모아 실무회의를 가지게 했다. 남에서는 박기영 사장을 비롯한 '아아자' 직원들,  북에서는 방종삼 총사장을 비롯한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관계자들이 모였는데, 며칠 간의 회의 끝에 양측은 2월 14일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대북광고사업 조인식을 가졌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의 광고 독점사업권이 넘어오게 됐다. 

 

광고촬여 계약서 체결 장면을 지켜보는 흑금성

 

그리하여 흑금성은 명목상을으로는 '사업'이라는 이름 하에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게 된다. 흑금성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을 직접 만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장성택을 가가장 자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면서 흑금성의 사업은 점차 크기가 커져갔다. 북한 내 광고촬영 독점권을 얻은 흑금성은 삼성 애니콜 광고의 북한 촬영 건도 담당하게 됐고, 북한 내 tv촬영 독점권과 mbc와의 합작에도 관여했다. 그러면서 흑금성은 여러 번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런 활동 와중에도 첩보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장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만났던 김정일과의 대화도 녹음기를 감추고 들어가 대화를 녹음하여 안기부에 보고하였다. 당연히 김정일을 만나기 전에 보디 체크가 있기 때문에 어설프게 은닉할 수 없어서 요도에다 삽입하는 녹음 장치를 썻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북한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남한 쪽 정보도 과감하게 넘겨주었다. 또한 기자나 야당 정치인들과의 접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편 첩보 활동을 위한 자긱기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그리하여 '흑금성'의 공작 활동은 1997년까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1998년 안기부는 큰 위기에 빠졌다.  바로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관련자들이 북한에 국지도발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한 총풍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일로 파문이 일고 안기부에까지 수사의의 손길이 뻗치자 안기부 간부 이대성은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국내 정치인과 북한 고위층과의 접촉내용이 담긴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흘리고, 이것이 한겨레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시사저널의 김당 기자가 흑금성을 만나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흑금성은 대북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의중을 파악한 결과 제 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중 이인제를 가장 선호하고 김대중을 가장 기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는 북한이 낙선시키려 하는 국가 지도자라면 역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아니겠느냐면서 김대중 후보 측과 접촉을 시도하여 새정치국민회의의 정동영과 천용택 의원을 만났다. 그 접촉에서 흑금성은 여러 제보를 통해 북풍을 막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줬다. 

 

그리나 이런 접촉이 안기부에 노출되면서 흑금성은 의심을 피하고자 두 의원을 만난 이유를 '해외 공작원 정보 보고,문건에 적당히 보고했다. 헌데 이것이 공개되는 바람에 그의 신분이 드러나 흑금성은 이중간첩 누명을 썻다. 한편으론 1998년 3월에 사업 관련 방북이 예정되있던 터라 방북 이후에 기사가 나오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왜냐하면 방북 후에 그런 기사가 나왔다면 흑금성은 북한 보위부에 의해 간첩죄로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성 파일에 흑금성의 자료가 있기 때문에 흑금성이 안기부 소속의 공작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결국 그의 신원이 밝혖혀짐으로써 흑금성 박채서는 공작 활동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다. 그는 1998년 안기부에서 끝내 해고되었다. 그가 받은 돈으 해직 위로금조 3억 원이 전부였다. 이후 그는 대북활동에서 일종의 비선으로 활동하다가 2010년 이중간첩 행각이 발각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다 2016년 출소하였다. 한편 커뮤니케이션 아잔자는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어 약 8억 4000만원을 받아낸다. 

 

이후 흑금성 박채서는 공작(영화)가 개봉후 한국의 시사프로그램에 자주 출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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