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마지막 왕자 이우왕자
의친왕의 차남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유약한 성격인데다가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과 달리 이우는 일제에 반항적이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의친왕이 총애했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양자가 되었기에, 일제 때 왕가의 일원으로서는 양아버지 이준용이 갖고 있던 공(公)의 지위를 계승했다. 일본 정부가 조선귀족들에게 수여한 오등작 제도의 공작이 아니라 별도의 계급이다. 그러므로 이우는 '공작'이 아니라 그냥 '공'이다. 이우를 공작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한제국의 직계는 왕족으로, 방계를 공족公族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의 신분상 위치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받았지만 대략 황족과 중간에 위치하였다고 볼수 있다. 따라서 친아버지와 같은 위치가 된 셈이다.
어렸을 때는 '이우 공자'로 불렸고, 운현궁에 양자로 입적하여 공위를 계승한 뒤에는 이우 공 전하로 불렸따. 생전에 왕자로 불린 적은 없다. 의친왕 계열의 이복 여자 형제 사이에서는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렸다. 사망 이후에는 '흥영군'이라는 군호가 추봉됐지만 이미 조선 왕조가 망한 때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내려준 공식적인 시호가 아닌 개인이 올린 사시이다.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 이우'로 불린다.
일제가 이우를 일본 황족인 기타시라카와노 미야 사와코여왕과 결혼시키려 하자, 선수를 쳐서 친일파 박영효의 서손녀인 박찬주와 결혼을 확정한다. 일본이 혼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이우 쪽에서 박찬주와의 결혼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이우는 어떻게든 조선인과 결혼을 하고자 했고, 친아버지 의친왕은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봤기에 성사된 약혼이라고 한다. 일본은 크게 화를 내고 약혼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박영효가 겨우 일제를 달래고 설득했기 때문에 무사히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 전에 한국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 편짇지도 주고 받았다.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 이종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이청은 이우의 사망 후에 일시적으로 공위를 계승하여 '이청 공 전하'로 불리었으며 미국 마케트 대학교를 졸업업하고, 설계 사무소의 엔지니어로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에 석파 학술 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 차남 이종은 브라운 대학교 유학 주중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그랬듯이 선택의 여지없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포병 병과 교육을 1년간 받고 1936년 도쿄 주둔 제8 포병 연대에서 일본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소속 연대가 만주로 파견되어 1년간 근무했으며, 1938년 대위 진급 후 포병 학교 교관으로 전임했다가 동년 12월 육대에 입학했다. 이후 1941년에 육군 대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황족 신분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순시했다. 1944년 3월에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일본군의 만주 일대 후방 경계 부대였던 1군 사령부 참모 장교로 1945년 5월까지 근무했다.
이후 1945년 6월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해서 히로시마 제 2총군 교육 참모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일단 부임 전 휴가차 들른 서울에서 갑자기 병이 나고, 이우가 병에서 회복되자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이를 돌보느라 부임을 1달 늦추어 7월 초순에야 히로시마에 부임했다.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직전 운현궁과 사동궁 식구들 앞에서 "일본으로 이제 들어가면 나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손으로 처와 두 아들을 모두 죽이고 가겠다."고 말하였고, 동생들과 사동궁, 운현궁,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말렸다고 이우의 둘째 여동생이 증언 하였다.
그리고 이우가 히로시마 주둔 제2총군 교육 참모로 부임하고 1달 뒤인 1945년 8월 6일 , 이우는 정시에 기마 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애마를 타고 출근 중 ,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폭심지로부터 7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폭당했다. 당시 무좀 때문에 이우와 함께 말을 탈 수 없어서 이우의 관용차를 타고 1시간 먼저 추출근해 있었던던 시종 무관 요시나리 소좌가 핵 공격 사실을 알고 서둘러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이우가 발견된 것은 폭격으로부터 8시간이 지난 오후 4시 경이었다.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 서둘러 인접 해군 병원으로 후송하자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그를 진찰한 해군 군의관은 "외상이 없다"고 진단했고 이우 본인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몇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중상을 보인 후 피폭 다음 날인 8월7일 오전 5시경 사망하였다. 독살설은 인터넷상에 떠도는 설일 뿐, 공식적인 이우의 사인은 피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