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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의 초라한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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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의 초라한 말년

 

 

 

정유재란이 끝난 이후 곽재우는 1599년 2월 진주 목사, 9월에 경상 좌병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역의 군무를 총괄하였다. 10월 임지에 부임한 곽재우는 12월 장계를 올려 영남 방어 대책을 건의했는데, 핵심은 과거에도 주장했던 산성을 거점으로 한 방어였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만인 1600년 2월 한장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려 당대 정치와 군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 장계에서 그는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고 전후 복구 사업에 매진해야 할 시점에서 조정 신하들은 붕당을 나누어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기만 하며 국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화의가 필요함에도 일본과의 화의를 반대하고 사신을 구금해 일본을 자극하는 외교적 미숙함, 이원익 같은 경륜을 갖춘 명신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정승직에서 몰아내는 인사, 수군만 중시하고 육군을 등한시해 산성 수축과 방어 체계 수립에 소홀한 군사 정책 등 국정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었다.

 

일본과 화의를 주장하는 등 장계 내용도 큰 문제였지만,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낙향해버림이 더 큰 문제였다. 곽재우가 왕명은 기다리지도 않고 낙향해 버렸다는 경상감사의 보고를 들은 관료들은 당장 곽재우를 체포해 추국할 것을 주장했다. 자신의 권위가 실추 되었다고 생각한 선조의 분노는 대단했다. 즉시 형벌이 논의되었고 의금부에선 대명률에 따라 장 100대에 변방으로 보낸 군역을 지게한다는 조항이 있음을 보고하자 선조는 그 정도론 안 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곽재우가 받은 형벌은 선조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선생문집에 수록된 연보에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02년에 풀려났다. 이 유배는 곽재우 인생의 큰 전기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도가의 영향을 받아 벽곡찬송을 시작했다. 

 

1600년 6월, 1601년 3월 곽재우를 다시 서용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선조는 단호히 반대했다. 이는 공신책봉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공신도감에서 경상 우도를 보전한 공을 들어 곽재우를 공신으로 책봉하자  조선군의 공적 자체를 폄하하고 의병은 아예 없었던 사람 취급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고 곽재우의 공적을 무시할수 없었던 공신도감은 1603년 4월 공신에 책봉될 만한 장수 26명을 선발해 보고할 때 곽재우의 이름을 넣었으나 곽재우는 결국 선무공신에는 들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신하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들어가지 못했다면 누구 탓이겠는가?

 

 

유배에서 풀려나고 2년이 지난 1604년 곽재우는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찰리사에 임명되어 원수 지휘 하에 경상도 지역의 방어와 군사훈련등의 군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도 변함없이 산성의 수축과 관리에 집중했다. 선조실록 1604년 4월 14일 장계에서 그는 안동의 천생 산성은 그 형세가 험난한 곳으로 전에 이시언이 수축공사를 시작하여 대강 수선을 마쳐 놓았으므로, 자신이 직접 가서 형세를 살펴보고 미진한 부분을 보수하여 수축을 마무리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를 곱지 않게 본 대북의 비방을 받아 1년을 채우지 않고 친가의 고향 현풍에 낙향해 망우정을 짓고 벽고을 하며 지냈다. 곽재우의 벽곡에 대해선 조정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1607년 5월 4일 사헌부에선 곽재우를 탄핵하여 벽곡은 도가의 방술로서 유교적 교화에 장애가 되니, 곽재우를 서용하지 말고 선비들 중에 벽곡을 따라하는 자를 적발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자고 청했다. 곽재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선조지만 벽곡에 대해선 그런 것으로 죄를 주겠냐며 각하하고 이후 재론하지 말게 했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사람이 도가의 수련방법에 심취함을 두고 이래저래 말이 나왔는데, 윤근수는 김덕령이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을 보고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세상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이라 해석했다.  그러나 김덕령과 곽재우의 교분이라곤 1594년 장문포 해전에 함께 참전했던 것뿐이고 김덕령이 옥사한 후에도 3번이나 더 관직에 나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가 쪽에 관심이 생겼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그 많던 재산은 의병 활동에 다 털어넣었고 전후에는 경제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1608년 광해군이 즉위했을 무렵에는 단벌 옷에 선전관이 보낸 교지에 답서를 보낼 종이 한장도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광해군이 곽재우를 높이 사서 경상우병사, 삼도수군통제사, 함경도관찰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고위직에 차례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북과 척을 진 관직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낙향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정치 생명은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끝났다. 이 상소에 그나마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광해군도 등을 들렸고 기회를 잡은 대북은 1614년 5월 터뜨린 자작 역모극에 곽재우를 집어 넣어 죽이려 했을 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장령 배대유의 변호 덕분에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끝으로 그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고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세를 풍미한 의병장이 남긴 것은 단벌 옷에 거문고, 낚시배 한 척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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