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달러 속 초상화 벤자민 플랭클린은 누구인가
미국의 정치인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으로 , 인쇄공으로 시작해 외교관,과학자,발명가,언론인, 사회 활동가, 정치 철학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스파이 등 온갖 직업들을 다 겸해, "보잘 것 없는 집안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미국인의 원조격 되는 사람이다.
비록 대통령을 지내진 못했지만, 미국에서 지금도 대통령급 이상으로 인지도 있는 인물이며 미국 달러화 중 100달러에 도안으로 채택된 인물이기도 하다. 10달러의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달러화 도안 인물 중 단 둘뿐인 대통령이 아닌 위인 그래서인지 미국인들은 벤자민 플랭클린이 대통령 출신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1706년 1월 보스턴에서 태어나 가난한 양초장이인 청교도 조슈아 프랭클린의 아들로 17자녀 중 15으로 태어났다. 글을 일찍 배웠지만 돈이 없어 2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형 제임스 프랭클린의 인쇄공 도제로 5년을 지낸다. 이때 시에 빠져 시쓰기에 열심이었던 벤자민에게 아버지가 했던 '시인이 되면 평생 거지로 산다'라는 말을 듣고 시 공부를 접는다.
1721년 형이 주간지 뉴잉글랜드 커런트 를 창간하자 다음해에 16살의 프랭클린은 신문에 기고문으로 14편의 사회평론을 작성하다가, 형 제임스가 쓴 글로 출간금지를 당하자 형은 베자민에게 바지사장 격으로 신문 발행인을 맡겼지만 서로 틀블이 끊이지 않으며 곧 일을 때려 치웠는데, 상사이가 아주 안좋아진 형 제임스가 모든 동네 인쇄소에서 벤자민을 욕하고 일을 못하게 해서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된 이상 필라델피아로 가서 한동안을 거지꼴로 지낸다.
이후 정착해 인쇄업을 하하던 프랭클린은 영국 런던에서 인쇄사업을 벌려서 실패하고 미국에 돌아와 1728년 인쇄소를 차리면서 그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사업이 커지면서 펜실베니아 지폐 인쇄권까지 얻고 1729년 펜실베니아 가제트를 창간한다. 프랭클린은 이 신문에 세계 최초로 만화를 삽이하고 도서관에 비치했다고 이후에도 여러 인쇄사업이나 사회회사업을 벌리고 청교도적인 근면함과 저축으로 급기야는 부동산 투자를 할 정도로 큰 돈을 벌게된다.
서점 주인이자 인쇄소 주인이자 출판사 사장으로서 미국의 초창기 문학을 이끌었던 미국 초기의 유명 문인 근의 펜실베니아 가제트에 1732년부터 1757년까지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펴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달력, 일기예보, 명언 , 시, 심지어는 수학문제 등 잡다하게 많은 내용을 실은 연보였다. 그렇지만 프랭클린이 직접 쓴 속담이나 명언들도 많아서 당시 식민지 미국의 언어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번도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연구욕과 탐구심이 왕성해 미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1737년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기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사회에 전기를 알리는 장본인이 되었다.
1748년에는 이미 성숙기에 들어선 출판사업을 아예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이나 과학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초점 렌즈, 소방차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목재를 연료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때문에 운송비용과 목재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염려해서 기존의 벽난로보다 열효율이 좋고 안전한 펜실베니아 화로를 발명했다. 그 이후 펜실베니아 화로의 문제점을 개선한 개방형 난로를 발명했는데, 개방형 난로는 지금도 프랭클린 난로라는 이름으로 땔감이 아닌 가스 등을 사용해 쓰이고 있다.
이렇게 여유롭게 연구를 이어오다. 1752년에는 비 오는 벌판에서 연을 날려가며 실험한 끝에 그 유명한 피뢰침을 발명해냈다. 연줄 끝에 금속제 열쇠를 묶고 그 열쇠를 관찰하여 번개가 전기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방귀 냄새가 지독하다고 방귀 냄새를 맡기 좋게 만드는 실험까지 했다! 아무래도 자기 홀로만만 연구하는 건 어렵다고 여겨서인지 상금까지 걸고 방귀냄새 좋게 만들기 공모전까지 열었으며 물론 상금의 주인공은 없었다.
화재 사고에 대해 관심도 많아서 필라델피아 소방회사라는 미국 최초의 소방서를 만들었으며, 피뢰침도 낙뢰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단순히 발명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대인적인 면모가 돋보이는데 그는 펜실베니아 화로나 피뢰침 같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했다. 물론 뒤끝쩌는 영국인들은 왕의 반역자라 칭하면서 그가 발명한 끝이 뾰족한 표준 피뢰침 대신 끝이 둥근 피뢰침을 사용했지만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지 영국에서도 결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받아주고 메달까지 주는 등 사실상 업적을 인정해 주었다.
1757년 정치에 입문해 영국에 파견되어 과세권을 땃고, 1764년에는 또 영국에 파견되어 인지조례를 철폐하며 일약 유명인사로 등극한다. 여기서 했던 말이 그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도 없다"물론 프랭클린이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이미 반 영국 기조가 돌던 당시에 흔히 돌던 슬로건이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2차 대륙회의에서 펜실베니아 대표로 나가서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한다. 이후 프랑스로 외교를 하러가 참전을 요청했다. 라파예등의 많은 프랑스 귀족이 미국을 지원하러 대서양을 건너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루이 16세가 참전을 결의했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사치스럽게 행동해서 일행에게는 욕을먹었지만, 이게 프랑스 사람들의 호감을 사 제대로 성공했다는 말이 있다. 다만 문제는 당시 프랑스 측 외교관이 그 유명한 탈레랑 이다. 그러다보니 프랭클린이 사실은 이 능수능란란한 외교관 손아귀에서 휘둘렸을 뿐이고 실제로는 그닥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전쟁 중 영국에 붙잡힌 미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사략선들, 즉 해적을 고용해 영국인들을 납치한 뒤 교환하는 기행도 저질렀고,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같이 독립 전쟁 때 첩보 활동을 한 미국 최초의 스파이였다. 난수 암호표와 해독 체계 역시 이 시기에 워싱턴과 같이 고안했다고
독립 후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그의의 연설과 간행물, 책은 북미 식민지인들이 미국인으로서 자각을 갖게 해주었으며 미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75년에 설립한 미국우정정공사의 창립에 기여했으며, 초대 우정장관을 지냈다.
중년부터 비만과 통풍으로 고생하던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흉막염으로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공인으로서 특히 거의 평생을 살앙아온 도시 필라델핑피아에 워낙 기여를 한면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굉장히 장수하면서 식민지에서 공화국까지 미국 초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존경을 받아 장례식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 전체 인구가 3만이 안 되었던걸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파를 끌어 모았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