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공민왕에게 모든 권력을 받은 신돈은 누구인가

반응형

공민왕에게 모든 권력을 받은 신돈은 누구인가

 

 

 

1322년 영산현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선 신돈의 법명과 출신지, 어머니의 신분만 적고 아버지에 대해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인지 고려사엔 없지만 영산 신씨의 신원경 혹은 신예라는 인물이 신돈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다.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의 노비였다. 어린 나이로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에게는 태후에 의해서 소개되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그즈음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한 승려가 나타나 그 자객을 없애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원명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꿈 속에서 본 승려와 행색이 비슷하여 마침내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그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선다. 이때 그는 법명인 편조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 

 

공민왕에게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 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영도첨의사사사,판중방감찰사사,취성부원군,제조승로사사,겸 판서운관사,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 

 

 

그야말로 공민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공민왕도 서서히 권력을 키워가던 그를 견제하였고, 환속한 천출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도 그를 불신하여 결국 사면초가 심지어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여 쫓겨나게 되었으니 , 사실상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곤 모두가 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게,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역모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당했다. 

신돈이 죽고 나서 공민왕도 사치와 향략에 빠지고 , 곧 자신의 측근들은 자제위들에 의해 시해당한다 .

신돈의 좌절된 개혁은 사실상 고려 최후의 개혁 시도였던 것, 공민왕이 죽은 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 일파는 즉시 신돈돈 일당의 죄를 사면했으나, 얼마 못가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이 되었다. 다만 신돈이 성균관으로 지원한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을 건국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