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100년전쟁의 시작 에드워드 3세

반응형

100년전쟁의 시작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을 일으켰던 왕이다. 조부 에드워드 1세 이후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 했던 그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의 배후에 프랑스 왕이 있다고 생각해 직접 프랑스를  공격하는 길을 택했다.

전쟁 초기에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에드워드의 군대가 우세했지만, 유럽에 흑사병 위기가 닥쳐와 전쟁은 교착 상태로 빠져 들었다. 1460년의 브레티니 화약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 전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대신 아키텐 전역과 칼레시 등을 할양받아 에드워드 3세의 목표가 부분적으로 달성된 듯했다.  조약 이후 9년 동안 평화기를 보내고 난 후 재개된 전투에서 전세는 대체로 잉글랜드에 불리했다. 무엇보다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막대한 돈이 필요했던 에드워드 3세는 의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치세에 의회는 크게 발달하여 양원제가 자리 잡고, 근대 의회제도의 뼈대가 형성 되었다. 

 

 

에드워드는 1328년 1월 24일 요크에서 필리파와 결혼 하면서 직접 국정을 맡기로 결심했다. 모티머의 독단적 통치에 분노한 데다, 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어머니 이사벨라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녀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티머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새로  랭커스터 백작이 된 헨리를 비롯한 젊은 귀족들과 동맹하여 왕권을 확고히 장악한 다음 모티머가 머물고 있는 노팅엄 성을 공격했다. 모티머는 성 안 호위병들에 둘러 싸여 있었으나, 야음을 틈타 왕의 군사들이 성 안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침입하여 그를  체포했다. 의회는 그의 유죄를 선고하여 교수형에 처하고, 이사벨라를 노퍼크의 라이징 성에 유폐했다.

 

에드워드 3세의 치세 말기는 궁정 내의 스캔들과 부패, 전쟁 수행의 실패, 프랑스 내에서의 군사적 손실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은 시대였다. 실정의 책임은 노망 상태에 빠진 에드워드에게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1371년 행정권을 장악한 그의 아들 곤트의 존에게 있었다. 존은 곧 에드워드의 정부 앨리스 페러즈와 왕의 총신 윌리엄 래티머 경, 런던의의 부유한 상인 리처드 라이언즈 등에게 둘러싸여 전제정치를 하였다. 

 

 

흑태자와 마치 백작이 이끈 일단의 귀족들이 하원을 이용하여 이들 일당을 몰아냈다. 1376년 선량의회에서 하원의 대변자인 피터 들라 매어는 상원에 나아가 하원의 이름으로 래티머와 라이언즈의 죄상을 고발했으며, 상원은 그들의 유죄를 선고하여 투옥했다. 의회는 또한 페러즈를 국외로 추방하고 자문회의를 재편하여 9명의 새 귀족을 장악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속에 1376년 흑태자가 죽고, 1377년에는 에드워드 3세도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백년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