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력왕 또는 장수왕 람세스 2세
고대 이집트 제 19왕조의 제 3대 왕(재위 BC 1279~BC 1213), 팔레스타인과의 오랜 싸움으로 화약을 맺고 시리아를 포기하였다.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을 각지에 남기고 신전 장례전, 신문등을 세웠다.
라메세스 2세라고도 부르며 아버지 세티 1세 이후의 팔레스타인 정복을 계속하였으며, 치세 5년경에는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왕 무와타리시와 크게 싸웠으나 결전에 이르지 못하여 이후 16년동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다 BC1258년 두나라 사이에 화약이 성립되어 이집트는 시리아를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파라오를 꼽으라면 투탕카멘과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람세스 2세일 것이다. 긍정적인 이미지로 보면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풍당당한 이미지로 그런 명성을 누리는 파라오는 람세스뿐이다. 람세스는 14세 때 이미 왕세자 섭정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10년 만에 왕위를 이어받고는 66년을 재위했다. 19왕조 전체의 존속기간이 110년인데, 세번째 파라오인 그의 치세가 그중 삼분의 이 가까이를 차지했던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정력왕으로도 불리는데 여러 아내를 두어 많은 자식을 얻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숫자가 몇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정부인이 최소 6명, 첩은 수십 명이었다고 하며 자녀의 숫자는 85명에서 400명까지 학자마다 다르게 추정한다. 부인들 중에는 람세스의 누이나 딸도 있었는데, 신성한 피를 보존하고자 왕녀가 왕족 외의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게 했던 이집트의 관습상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더욱이 람세스는 오래 재위했으므로, 점점 더 공주가 늘었으며 그 공주들은 람세스의 후궁을 점점 더 늘리게 마련련이었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지위는 오직 한사람 네페르타리에게만 부여 되었다. 18왕조의 파라오 아이의 증손녀, 또는 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 넾네페르티티의 방꼐 혈족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람세스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 동매을 맺은 히타이트의 왕비와 친목을 위한 선물과 서신을 교환하는 등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그녀가 재위 40년경에 죽자,람세스는 왕비의 무덤으로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무덤을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수많은 왕자들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거나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의 사제로 일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그가 수립한 종교 질서상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카르나크 신전의 제사장직은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평생 스스로 겸임했다. 그의 오랜 재위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뛰어난 정치력, 또는 리더십의 증거로 거론되곤 한다.
람세스는 적어도 90을 넘긴 나이로, 노령으로 숨졌다.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미라를 보면 그는 매부리코에 강한 턱을 가졌으며, 이집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붉은 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이 60여 년이나 재위하다 보니 그의 아들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으며, 왕위는 열세번째 아들인 메네프타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