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이런 십상시들 평가
황건적의 난의 의의는 내부적으로 쇠약해 있던 한의 세력을 대내외적으로도 크게 위축시켰다는 점과 각지의 군웅들이 힘을 키울수 있는 계기였다는 점에 있다. 즉 난세의 시작인 것이다. 이 때부터 시작된 혼란은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할 때까지 무려 400년 이상 넘게 이어졌다. 보통 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일컫는다.
황건적의 난 이후 한의 멸망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면 일단 황건적의 난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나라의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전근대 제국에게 있어"교통과 통신수단의 제약 속에서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 중 하나였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위축될 경우 지방에 대한 통제력 역시 함께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나라 역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이 실추 되고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의 통치기구들이 군사력을 확대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 할수 밖에 없게 되면서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상실하게 된것이다.
이전까지 한나라 조정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방관들이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군웅으로 변모한 것이다. 한 이전의 통일제국인 진은 아직 통일제국의 체제가 정착되기 전에 영향력을 상실했기에 진나라의 쇠퇴기에 나타난 현상은 지방세력의 독립 이라기보다는 진에 병합되었던 국가들의 부활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후 당송교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난 통일제국 멸망사의 효시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에 서술니 바와 같이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느는 관점은 틀린 관점이라고 할수는 어없으나,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황건적의 난 자체가 한나라가 쇠락해진 상태였다는 강력한 증거이고, 난을 겨우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은으니 이후 조정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한나라가 본격적인 멸망 수순에 돌입핳ㄴ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후에도 한한나라가 회생불가의 수준에 이르러 멸망이 실질적으로 확정되었다고 여겨지기까지는 몇차례 더 중요한 분기점, 또는 역사적 이정표를 지나치게 된다.
예를 들어 황건적의 난 이후에도 상당히 남아있던 중앙정부의 조직력을 결정적으로 실추시켜 사실상 정부 붕괴의 상태로 몰아넣은 십상시의 난이 있고, 십상시의 난 이이후 공백이 된 중앙정계에 서북지방의 군벌인 동탁이 진입하여 헌제를 협박하여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직위를 부여받아 온갖 국정농단과 전횡을 일삼고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면서 황제의 권위까지 크게 실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