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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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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역사

 

 

 

과거 사료들을 살펴보면 요동에 살던 고구려와 발해 유민, 고려 말 요동에 가서 살던 사람들 ,병자호란 때 끌려가서 그냥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도 넓게는 재중동포의 기원이라 할수 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청나라에 살던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날 그 사람들은 동화된 지 수백년이 흘러 사실상 중국화되어 본국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이는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들과도 비슷한 입지다.

 

현대적인 재중동포인 조선족의 시초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살기가 점차 힘들어지자 중국 국경지대 지역이 막연하게 더 나을 것이라 여겨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간도의 조선인 거주지역은 독립군의 은신처 및 보급 역할을 하였고 봉오동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중 일부가 중국에 눌러앉아 조선족으로 남은 경우도 있으나 극소수에 속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일제에 협조하여 편하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조국독립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타지를 떠돌며 험난한 일생을 자처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광복 이후에도 중국 땅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독립운동 중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일대를 장악하자 일본이 주도한 "만주개척운동"에 의해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갑자기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대 이후 중국 내 조선인 우파 대부분은 상해, 중경 등으로 떠났고 그 뒤로 내 조선인 무장세력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만 남게 되었고 다수의 좌파 단체는 중국 공산당 파로군에 편입되었고 우파 단체는 광복군에 편입 되었다. 

 

한편 팔로군에 편입된 조선의용군은 광복 뒤에도 중국에 남아 국공내전에 참여하였고, 한국전쟁 전에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고 6.25 전쟁의 선봉이 되어 대부분 전사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연변자치주의 전신인 간도 지역에서도 북한의 징집이 이루어져 조선인 상당수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조선족 사회와 교육기간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6.25전쟁 참전을 항미 원조라고 부르며 미제의 침략에 맞서 승리했다고 자평하고 기념식을 치른다.

 

한국전쟁의 휴전이 확실시 된 1952년에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 잔류한 조선인에 대해 시민권을 부여하고 중국 내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만들었으나 1955년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중국에서 자치구는 성과 동급 이나 자치주는 성에 예속된 행정구역이다. 그때 당시에만 해도 조선족들은 북한으로 가면 즉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어, 문화대혁명 전 까지 수십만 명의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귀국했다. 지금이야 무슨 미친짓이냐고 하겠지만, 사실 90년대 초중반만해도 북한이 중국보다 잘 살았다. 

 

1990년대부터 북한이 국경을 봉쇄하면서 두만강 근처에 판문점 비슷한 검문소에서 짧은 시간동안 이산가족 면회를 허용한다. 조선족들의 말에 의하면, 얼굴에 화장을 시키고 깔끔한 한복을 입혀 내보낸다고 한다. 면회시 옆에 군인이 감시하고 있으며 안부를 전하면 무조건 "잘먹고 잘 살고 있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물건이나 돈을 건네는 게 가능하여 조선족들이 달러 돈을 챙겨주지만, 본인한테 돌아갈지 는 미지수다.

 

조선족과 한국 사이의 이산가족은 , 없는 건 아니지만 북한에 비해 상당히 소수다. 중국으로 넘어간 조선인 대부분이 중국과 인접한 함경도/평안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많다. 그래서 조선족 거주지에 조선족들의 말투를 보면, 경상도 말투를 포함한 한반도 동부 방언과 비교적 유사한 경우가 대부분인 걸 알수 있다. 그러나 경상도 출신 조선족 1세대는 대부분 한반도를 떠난 지 거의 1백년 이상이 지낫기 때문에 이산 가족이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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