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장군

반응형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장군

 

 

1878년 ~1908년

대한제국 시기 항일 의병 운동의 평민 출신 의병장.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기준으로 영해도호부 지역이었다. 축산면에 신돌석 장군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구한 말 조선의 의병장 , 중인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었으며 본명은 신태호. 별명은 태배산 호랑이로 불리우며 ,어린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되는 시내를 단번에 뛰어 건널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전신주 여러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의 전신주는 지금의 돌이나 금속이 아닌 나무였긴 하지만 의병장으로서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 쓰여진 일화로 보이니 이런 걸 진지하게 믿지는 말자.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대항해, 평민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농민 중심 병력은 산악 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보였다. 참고로 그가 처음 의병에 참여한 시기는 나이 19세로 1896년, 을미사변 다음해가 되겠다. 따라서 갑자기 평민 의병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전공을 인정받아 을사조약(1905년)때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 의병장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경약한 일본군은 신돌석을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 했다. 전공도 후덜덜해서 1906년 울진 앞바다에서 일본군 군함 9척을 침몰시킨 적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역사가들의 명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어떤 함종이었는지, 정말 침몰인지 함내 시설 파괴서 군함 격벽이 날아가 침몰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기 힘들다 , 무려 9척이나 ...

 

최후는 그의 부하이자 고종사촌이었던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다. 웃기는는 건 목을 베서 가져가니 정작 일본군은 살아있는 신돌석을 잡아오랬지 죽은 신돌석은 필요없다면서 쫒아내고는 보상 일체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배신자들에게 딱 걸맞은 대접이라고 볼수 있겠지만, 참으로 간악한 당시 일본군의 마인드를 잘 알수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비극적인 야사가 하나 있는데 이 고종사촌 형제가 신돌석에게 술과 고기를 극진히 대접하고, 자고 있을때 공격했느데, 이때 공격받은 신돌석은 이렇게 외쳤다. "형님, 형님, 누군가 나를 찔렀소!" 즉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형제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어떤 옹기장수가 신돌석의 죽음을 알게되자 옹기를 전부 깨버리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활발한 의병 활동을 펼쳤으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1907년) 때는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양반 의병장 중심의 창의군에서 명목상의 직책만 있었을 뿐 실제로는 아예 제외 당했다. 의병장의 중심이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양반들이었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