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의열단
의로운 바를 맹령하게 실천하는 조직 "의열단"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 독립운동 단체로 쉽게 말해 대일 무장 단체였다. 이단체를 발족한 약산 김원봉은 3.1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한인들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 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 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 곽경(곽재기), 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발족시켰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다. 김대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곽경, 강세우, 이종암 ,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 김원봉과 윤세주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의열단과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광복 때까지 생존은 커녕 1920년에 모두 사망하였으며, 윤세주도 김원봉과 갈라선 후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전에 사망했다. 때문에 맨 위에 나와 있는 사진에는 김원봉을 제외하면 여기에 있는 13인이 아무도 없다.
창단 직후 작전의 실행에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 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할 때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 할 때가 많았따. 이들 중에는 김시현 열사가 있는데, 그는 광복 후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 이었다.
비밀 결사 조직인 탓에 단원이 정확히 몇명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2010년에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 도쿄에도 50여 명이 상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 웨일즈는 김산을 인터뷰해 저술한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이정도의 규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대단한 사실이다.
신채호는 1923년 1월에서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부 독립 운동가들의 문화주의 ,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 노선을 제시 하였다. 당시 이승만이 이끌던 임시정부의 소득없는 외교 일관론과 거기에 따른 내분에 신물이 났던 신채호는, 이체의 타협주의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 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 민족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이 실질적인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중국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