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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과 그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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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일명 '녹두장군' 1980년대 교과서나 위인전에서 1854년생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천안 전씨 시조 전섭의 53세손이다. 서당. 한약방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몰락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 형호, 승록 등의 이름가 함께 족보명은 기창으로 나오고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 김씨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창 당촌 마을에서 서당 훈장, 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또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라는 별명을 들었다.

 

 

전봉준이 젊었을 때 가정 생활은 상당히 곤궁했다. 전봉준공초에 보면, 땅은 논밭 합쳐 세 마지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 마지기는 약 6백평에 이르는 면적으로, 당시 여느 빈농층이 소유한 면적 수준이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 

 

고창 당촌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기울어짐에 따라 순창, 임실 등을 떠돌다가 서른 살 즈음 고부 마을 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했다.

 

30대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98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약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개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훗날 동학 농민 운동 과정에서 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학하고 부조금으로 2000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이에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곤장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고 그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으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그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는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분노한 그는 이때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만석보를 헐어 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안해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결국 그놈이 그놈, 그 전에 왔던 새 군수 박원명은 그래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그냥 답이 없었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명을 모아 , 동학군을 조직하여 그 유명한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킨다. 이때 동학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 동학 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군은 승승장구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이 확대 되었고, 깜짝 놀란 조선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미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군과 톈진 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 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 동안 이어진 평화는 깨지고 만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군대를 보내 도성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면서 멋대로 '개화'정책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이번에는 척왜근왕을 외치며 다시 농민군을 모았다. 북접도 이에 합류하면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했고,몇 번 더 패전을을 당한 끝에 순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재판 후 동학농민운동을 지도했던 같은 지도자급의 동지인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과 함께 상형당했다. 

 

참고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는데 오랫동안 동학 혁명군 강경파 지도자였던 김개남의 효수된 사진이 전봉준의 시신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은 이 문서에 첨부된 사진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관군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 간부들을 사형시킨 뒤 시신들을 유족들에게 넘기지 않고 그냥 매장했기에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한성에서 사형형당한 전봉준의의 시신은 훗날 단국대학교 죽전 캠퍼슥스가 세워진 야산에 버려졌다고 한다. 김개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임술군 학암리 야산에 버려졌다고 전해지며, 손화중과 최경선 등의 경우는 아예 유해의 행방이 묘연한데 관군이 처형 후 그대로 암매장한 걸로 추정된다. 이런 까닭에 정읍시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다. 김개남의 경우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임실군 학암리 야산 일대에서 2010년과 1011년 시신을 찾기 위해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들짐승에게 먹히거나 해서 뼈도 남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2016년 9월부터 문화체육 관광부 산하 특수 법인인 동학 농민 혁명 기념 재단이 전북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에 있는 전봉준의 추정 묘역을 발굴할 예정이락라고 한다. 이곳은 주민들 사사이에 전봉준 장군의 묘라고 전해져 왔고, 30여년전 장군천안전공지묘라고 쓰여진 1미터 높이의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17세기의 회곽묘 구조임이 밝혀져서 전봉준의 묘는 아니 것으로 확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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