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이름은 리스케였으나, 천하다 하여 도시스케 슌스케를 거쳐 히로부미로 이름을 바꿨다.
원래 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는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추켄 미즈이 다케베에게 근면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겐 신분을 얻는다. 추겐이란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와 평민 사이의 세습제 신분으로 짧은 칼을 차는 것은 허용했지만, 상급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하는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이 신분 출신이었다. 이윽고 미즈이다케베가 이토 가의 양자가 되면서 아시가루가 되고, 두 부자도 하급 무사 아시가루 신분을 얻는다.
1857년, 16살 때 요시다 쇼인의 마츠시타 촌숙을 찾아가 배웠다. 15살 때부터 초슈번의 지금의 말단 공무원(9급 공무원)으로 에도만 경비직으로 파견되었는데, 윗 상관인 쿠루하라 료조가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추천하면서 거기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다. 신분이 낮아서 교실 밖에서 서서 수업을 들었다고도 한다. 쿠루하라 료죠, 카츠라 코고로의 종자 일을 하면서 공부했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에 조슈 번 유신지사로 메이지 유신을 위해 크게 활동하고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나 이노우에 가오루, 노기 마레스케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슈계 인사들은 대부분 쇼인의 제자. 가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봐도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타카스기 신사쿠, 부정 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출세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요시다 쇼인의 마츠시타촌숙 선배들의 행동 대장 똘마니 노릇을 하던 히로부미, 선배 잘만난 덕분에 영국 유학도 경험하고 능력있는 선배들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밥상 차릴 때부터 부엌에서 밥이나 짓던 쫄다구 히로부미를 선배들이 밀어주고 당겨줘서 고위직을 맡고, 선배들이 차례차례 죽으면서 어느새 자신이 일본 초대 총리로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고 국제 정세를 읽는 감각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선배 잘 만나서 대성공한 케이스이다.
이토는 쇼인에게는 인정받은 일이 없고, 오히려 타카스기 신사쿠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는 나이 차이도 있고, 계급 차이도 있었지만 절친한 평생의 동지였다.
1859년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의 대옥사로 죽은 후, 존황양이 도쿠가와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불타 올랐다.
19살 때인 1862년 다카스키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일당이 주도해서, 에도의 시나가와에서 건설 중이던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서 불을 붙이는 역활을 한 적도 있고, 본인은 부인했지만 천왕의 퇴임을 주장한 국학자를 암살하기도 했다.
22살 때는 상급 무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제안으로 조슈 파이브라고 불리우는 친분이 있었던 4명과 함께 조슈 번의 거액의 공금을 횡령해서 그 돈으로 영국으로 밀항, 영국에서 해군 기술을 배우려고 유학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요코하마 항구를 출발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 초슈 번과 영국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 이 소식을 알게되고 영국 생활 6개월 만에 귀국을 결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시상적으론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영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선진 문명을 접하면서 존황양이에서 양이를 버리고 개화파로 돌아선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의 영국과의 중재 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영어 실력은 서툴러서 실제 통역은 영국 측 어네스트 사토가 다했다.
막부와 조슈번 사이에 내전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데 참여,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타카스기의 거병에 맨 먼저 참여했고, 이것은 일생 자랑거리가 된다. 야마카타 아리토모는 맨 나중에야 거병에 참여했는데. 이토는 이 일을 들먹이면서 평생 야마가타의 기를 죽였다.
도사,히젠, 사쓰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전쟁에서 조슈와 사쓰마 파벌을 중재하면서 사쓰마 파벌의 오쿠보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며, 오쿠보, 기도 등의 거물들이 잇따라 숨지면서 생긴 정권의 공백을 메우녀서 수완을 발휘하고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와의 정쟁 직후 메이지 정권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 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평민이나 다름 없던 일개 하급 무사가 멀쩡한 무사들도 평민이 되던 시절에 되려 공작이 되는 벼락 출세를 한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극초반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비주류 노선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사쓰마 파벌의 영향력이 워낙 강한 초기에는 , 정치인-관료 진영의 온건파 조슈 파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듯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과 중국 및 아시아 침략의 원흉으로, 1909년 러시아와의 회담이 있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총탄 세발을 맞고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