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생년이 확실하지 않다고들 하나, 1455년 생이 정확하다. 실제 국립고궁박물관의 폐비 윤씨 태실속의 태지문에, 단종 3년(1455년) 음력 6월 1일 생으로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네이버 백과사전 등에는 성종과 연상의 띠동갑인 1455년 생으로 나와 있고, 드라마 (인수대비), 도서(왕을 낳은 후궁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설을 채택하여 성종과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는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당연히 말이 안된다. 실제로 1445년 생이라면 29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는 것인데, 당시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이었고, 늦어도 20살에는 결혼하는 걸 당연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었어도 엄연히 양반의 딸인 윤씨가 29살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후궁이 되었다 함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심지어 30살 가까이까지 결혼을 안 할 시에는 나라에서 혼수품을 챙겨주며 결혼시키는 정책까지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양반 집안에서 그런 경우는 아예 없었다고 봐야 할 정도이고, 무슨 이유든 정말 그 나이까지 (중병, 심각한 장애 등) 결혼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당연히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 성종(1457년생)보다는 나이가 실제로 2살 많기는 한데, 정안왕후, 원경왕후, 소헌왕후 등 조선 초기 대부분의 왕비들은 남편보다 2살 연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나이 차이가 지극히 정상이다.
폐비윤씨는 간택 후궁으로 입궐하였다.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신 씨의 딸이다. 하지만 윤기견이 일찍 요절해서 , 사실상 과부인 신 씨 아래에서 성장했다. 입궁하기 전에는 베를 짜서 어머를 봉양할 정도로 효녀였고, 윤기견은 집현전 학자 출신으로 ,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편찬에 참여했다. 딸이 추존되자 부원군이 되었으나, 반정으로 삭탈관직되었다.
폐비 윤씨보다 3개월 후에 간택후궁으로 들어오는 정현왕후 윤씨는 윤호의 딸인데, 윤호는 파평 윤씨로, 대단히 부유하면서도 비리가 많아 친척인 정희왕후가 처벌을 명했을 정도였다. 이런 점이 모두 왕비 간택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공혜왕후 사후 2년 후 왕비가 되었다. 시어머니 인수대비 역시 마음에 들어 했는데,총애의 이유는 무엇보다도 윤씨가 당시 임신 중이었다는 것, 간택 시점에서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4월 후에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이 아들이 바로 연산군 성종의 장남인 연산군은 원자로 책봉되었고, 원자의 생모인 윤씨의 위세는 더욱 상승했다.
그러나 다른 후궁들과 분란을 일삼아, 왕비가 된 지 겨우 1년도 안된 1477년에, 방안에서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비상이 묻은 곶감이 성종에게 발각되면서 폐출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을 우려한 중신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방양서와 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에게만 죄를 물어 ,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를 장형 100대를 때려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짓고, 윤씨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분란은 계속 이엊어져, 결국 1479년 (성종 10년) 음력 6월2일, 폐위 되었으며, 2년후 사가에서 사사되었다. 이후 연산군 때 제헌왕후로 다시 추숭되고 능도 보수하여 회릉이라고 부르지만, 중종때 다시 호칭을 되돌렸다. 그래도 묘를 다시 부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