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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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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대한북로독군부 250~300여명)는 일제 추격대가 오는 걸 알게 됐고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들을 봉오동 골짜기 내로 진입 시키기 위해 이화일로 하여금 일본군들을 유인케 했다.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새벽 6시경('독립신문'에는 새벽 6시 30분경이라고 기술)에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 도착했는데 이 때 이화일 부대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다. 

 

보다시피 이 기습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판이하게 다른데 먼저 '독립신문'에서는 이때 이때 이화일 부대가 일본군의 전위중대를 모두 몰살시켰다고 기술한 반면 일제의 보고서에는 독립군의 기습을 받았지만 곧 이를 격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 이화일 부대의 목적이 일본군들을 봉오동 안쪽으로 유인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화일 부대는 일본군에게 한바탕 사격을 가하고 거짓퇴각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바로 봉오동 안쪽으로 진입하여 곧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봉오동 상촌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봉오동은 분지(산지역으로 둘러싸였고 지역 안은 평평한 지역)형태였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정도 형성되어 있다. 골짜기 안에는 마을 세개가 있다. 홍범도 부대는 지형을 고려해서 4개 중대로 편성했고 각 중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갈라놓아 배치 하였다. 

 

 

당시 홍범도 부대들은 신식 총기로 무장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졌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이 떨어졌다. 거기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부대로 쓸수도 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기관총을 쓰기 어려운 장소다. 또한 매복을 할 경우 피아구별이 힘들어서 일제군이 포병을 쓰기 힘들다. 홍범도는 의병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을 봉오동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리고 일제군을 기다렸다. 

 

대기하던 남양수비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가 오자 그쪽으로 합류 했다. 추격대는 8시 30분경부터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여다. 그러다 자기네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바로 사살했다. 

 

조선인 민간인들을 집을 빠져나와 피난을 갔다. 많은 집들은 사람이 없어 비워있었다. 석현주재 중국인 순경들을 순찰하다 일제 추격대를 발견했다. 중국인 경찰들은 일제추격대에게 자신들 땅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추격대는 중국 경찰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더욱 침입하였다. 

 

추격대는 늦은 아침을 지어먹고는 한 농민에게 가서 수레에 기관총을 실으라 요구했다. 수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마을주민들을 발견했다. 추격대는 그 마을을 향해 "암탐사격"을 하며 무차별로 쏴갈겼다. 피난가지 못한 한인 민간인들은 무참히 살해 됐다. 

 

오후 1시경 추격격대 척후병병이 매복지점으로 다가갔다. 항일군인들은 그 척후병을 그대로 보내줬고 추격대 본대를 기다렸다. 추격대 본대는 그 장소에 들어가기전에 다시한번 '암탐사격'을 했다. 여러 곳에 무차별 사격을 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는 대응하지 않았다. 일제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다시 추격대는 행군종대 대형이었다.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 병사들이 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짧은 기간에 모집해서 편성한 부대였으나 훈련은 제대로 받은 부대였다. 

 

 

추격대가 매복장소로 다가왔다. 홍범도가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 일제군인들은 화력이 우세했으나 지형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해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퇴각했다. 항일군은 그런 도주하는일제군인들을 계속 추격하며 사격했다. 그러다 오후 4시 20분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렸다. 폭우가 쏟아졌다. 항일군 지휘부에서 파란 손깃발을 흔들었다. 항일군인들은 물러났다. 일제 군인들은 6월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 건너편까지 철수했고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철수했다.

 

홍범도 부대는 일제 추격대를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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