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그는 누구인가?
인도에서는 단순히 위인을 뛰어넘어서 신적으로 추앙받고 있다. 5루피부터 2000루피까지 이르는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전부 간디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인도의 지ㅖ는 색상과 크기, 적힌 숫자를 제외한 모든 도안이 똑같다. 동전은 엄청나게 다르다. 같은 액수인데도 굵기 크기 등등이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간디는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인이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욕 타임스는 지난 1천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선정했다. 성웅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이순신에 주로 붙이지만 중국 등 중화권에서 성웅이라는 단어는 자기 나라인 중국사의 어떤 역사인물이 아니라 거의 이 사람의 전용 칭호에 가깝다. 구글에서 성웅을 한자로 검색하면 간디만 뜨고 자동으로 완성된다.
비폭력 이미지로 워낙에 알려진 것과 달리 학창시절엔 술,담배도 피웠으며 고기도 먹고 교수와 정면에서 맞짱까지 깟다고 한다. 단 교수와 맞짱까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간디가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무결점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제 현대에 들어와 간디에 대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독실한 광신도에 가까운 힌두교인이었던 간디는 실제로 힌두교 내에서 4개의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붉불가촉천민에 대해서는 악담을 퍼붓기도 하고, 심각한 신분 차별을 보이는 발언들을 하기도 한다. 실제 이에 대항하여, 힌두교로는 인도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불가촉 천민출신 암베드카르 박사는 다른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대규모로 불교로의 개종을 하기도 한다.
또 쇼맨십이 강했으며, 자기애도 강했다고 전해진다. . 소는 인정을 해도 불가촉 천민은 인정하지 않는 신분차별적 발언들이 숱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암베트카르 박사와의 갈등이후, 그는 불가촉천민의 아이를 양자로 거두기도 하는 쇼를 하며, 그들에게 하리잔이란 이름도 붙여주었다. 이에 대항하여, 힌두교의 카스트에 반감을 갖가졌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달리트라고 부르기로 하고 운동을 펼친다. 당연히 현재 인도에서는 누구도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실제 대우가 하리잔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의 작은 소국인 포르반다르 국에서 카람찬드 간디와 파트리바이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가람찬드 간디는 포르반디르 국의 수상이었다. 간디 가문의 종교는 힌두교 정확히는 바이슈나바 파이지만 집안에서는 자이나교, 이이슬람 출신의 사람들과도 많은 교분을 맺었다. 간디의 카스트는 평민인 바이사였다.
모한마스 간디는 어린시절을 포르반다르에서 보내다가 간디가 7세즘에 아버지가 라자스타니크의 가신이 되면서 라지코트로 이사했고 거기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생활을 한다. 학교생활중이었던 1883년 13세의 나이로 마칸지 가문의 카스토르바이와 결혼한다.
간디자서전에 따르면 자신의 어린시절은 그렇게 모범적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간디의 어린시절 일탈을 적어보면 친구의 권유로 고기를 먹었던 일이 있었다. 다만 고기의 경우 식욕보다는 호기심과 당시 인도에 퍼져있던 개혁 문화 다시말해 인도의 카스트나 힌두교 악습같은 비합리적인 문화를 없애고 서양식의 합리적인 문화를 수용하자는 움직임이 퍼져있었고 그중 하나가 영국인처럼 육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뒤 한 1년즘 먹다가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외의 일탈로는 아내와 싸운 뒤 매춘을 하려다 실패했던 일도 있었다고 쓰고 , 12세 때는 담배를 사려고 하인의 돈을 훔친적도 있었다고 쓰고 있었고, 15세 때는 형의 금팔팔지의 조각을 훔쳤던 일도 있었다고 쓰고 있다. 이후 아버지에게 용서받고 그 일을 그만뒀다고 쓰고 있다. 그 외에도 자살시도도 한번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하던 중 간디가 16세이던 1885년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가 사망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망은 모한마스 간디에게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는데 당시 간디가 밤중에 아내와 성관계를 갖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간디는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간디는 1887년 11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바우나 가르 주의 사말다스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렇게 한학기를 보냈다가 방학중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브지 다베간디는 자기 아들인 케발람 디베가 있던 영국으로 유학을 조언하게 되고 때마침 사말다스 대학교에서 성적과 흥미를 잃었던 모한마스는 반대하던 어머니를 설득해 술과 육식, 불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영국 유학을 허락받아 8월 10일 봄베이로 떠난다. 간디는 한달간 봄베이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간디가 속한 모드 바니아 카스트의 세드에게 소환을 당하고 여기서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들었지남 간디의 뜻을 꺽지는 못했다. 또한 많은 힌두인들이 믿고 있던 바다를 건너면 카스트 계급급을 잃는다는 금기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1888년 9월 4일 , 간디는 인도 붐베이를 떠난뒤 9월 말 영국 사우샘프턴에 도착한다.
본래 군인이 되기 원하여 19세가 되던 1887년, 영국의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참전하기 위하여 자진입대하였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입대하지 못하게 된다. 1888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에서 공부를 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간디는 1893년에 남앞아프리카로 떠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된다. 그러나 개업 직후 남아프리카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운동동을 벌이게 되는데 특히 남아프리카 정부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게 하는 법률에 강력히 반발하여 이러한 법률의 폐기를 주장하였고 이를 위한 게릴라 시위를 일으키려다 사전 발각되어 체포당하게 된다.
이후 출소한 간디는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국군 입대를 지원하게 된다. 간디는 영국군의 입대시험 및 신체검사에 무사히 합격하여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나 당시 서류에는 계급이 없는 지원병 신분이었다.
제2차 보어전쟁은 영연방의 지상군과 보어인으로 구성된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연합군과의 전쟁이었는데 최초2년간은 보어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버텨내었으나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기 위해 영연방이 당시 40만의 보어인 인구수에 필적하는 35만 병력을 투입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말살작전을 펼쳐 결국 보어인 총 인구수의 1/4에 해당하는 10만여명을 사살하여 결국 승리하게 된다. 이 때 간디와 인도인들은 의무병적으로 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대표자 격이 되어 각종 조직의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난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중요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으며 다만 인도인 차별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넣는 것 정도 외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영국군 모병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당시 전쟁영웅으로 각광받은 간디를 본 수많은 젊은이들이 영국군에 지원하였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종전 이후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자 모병관으로서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다시 한번 영국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게 된다. 이후 간디가 군 생활을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받은 정근 훈장까지 합하여 총 3개의 영국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러나 그는 영국군인임에도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급 할수 없었으며 영국에서도 인도인 신분으로 각종 차별대우를 박게 된다. 특히 1919년 영국에 반대하는 인도인을 영장없이 처벌 할수 있는 롤레트 법이 통과되었고 이 때문에 자신 또한 영국에서 배척당하게 되자 결국 정치계에 입문하여 본격적인 인도 독립을 운동을 이끌게 된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당시의 간디의 나이는 50세였다.
간디의 독립운동 슬로건은 '무저항 비폭력' 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러한 가르침은 영국에 대해서만이었는데 따라서 간디는 각종 집회나 시위를 영국군의 허가를 받아 진행하였으며 영국군의 해산명령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집회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당시 영국에서는 간디가 인도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초기에는 구속하여 감옥에 다우었으나 출소 이후 행적을 조사한 결과 영국에 어떠한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이후 나이가 들자 정치계 입문을 갈망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보다더 구체적인 '비폭력'으로 심화하기 위해 상징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로 영국의 소금세 제정에 반대해 360km를 행진한 소금의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또한 감옥 안에서 영국의 공장제 수공업에 대항하는 인도의 전통 수공업을 상징하는 물레를 돌린 것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와 파키스탄과 총파키스탄의 분리를 반대하였으며 지속적인 통일을 주장하였는데 초기에 이슬람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강경론을 펴치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진 것이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으며 간디는 이를'정신적 비극'이라고 칭하였다. 결국 인도가 분할되자 간디는'나는 125세까지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라며 상심했고, 단신을 하기도 했다. 이 단식은 평소보다. 아니 상다이 위독한 지경까지 가서 당시 싸우고 있던 무슬림과 힌두교도 당수들이 급히 화해를 했을 정도 였다고 한다.
리고 그후로 과격 보수파 힌두교 신자들은 카스트 교리를 부정하고 무슬림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 간디를 적대시하게 되었으며,결국1948년 1월30일 오후5시17부분 79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암살 당하던 날 두 증손녀의 부축을 받아 그를 환영해주는 군중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그에게 인사하며 마하트마의 발을 만지려고 했다. 이에 간디는 두손을 모아 쥐고 보답해주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몸을 일으켜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든 뒤 정면에서 세발을 쏘았다. 간디가 "라마"하고 신의 이름을 부른뒤 그의 몸이 땅위로 쓰러졌다. 이는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라 간디의 증손녀들과 주변의 군중들은 이 암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라마 였다고 한다. 간디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고 유해는 암살 다음날인 1월 31일 아무나 강 남쪽의 라지가트에서 화장되어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화장터에는 간디의 유언이 새겨진 검은색 대리석 대좌가 잔디밭 가운데에 놓여 있다. 수많은 인도인들이 간디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롓례식날 무려 2백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와서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다. 1951년 기준 델리 인구가 고작 174만명 정도였던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파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