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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선생의 저격범 안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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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선생의 저격범 안두희

 

 

 

대한민국 육군 포병장교이자 백범 김구를 저격한 살인자

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후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 후 극단적 반공주의자로 변했다. 육사 8기 졸업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다. 

 

 

포병사령관 장은산과 김지웅, 홍종만의 사주를 받고 1949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이에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년도 안되어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군에 복귀 하였다. 1951년 군 재적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예편 하였다. 그 이후 군 납품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기도 했으나. 4.19 혁명 이후 민족정기회복을 부르짓는 청년들에게 쫓겨 잠적생활과 납치 등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65년 곽태영에게 칼을 맞았고, 1987년 권중희에게 '정의봉'을 맞아 갈비뼈와 머리가 깨졌다. 1992년에는 권중희가 엉덩이에 놓은 대침을 맞고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받아 백범을 암살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지만 이후 부인하였다. 결국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의 '정의봉'에 맞아 피살당했다.

이때가 그의나이 79세 였다.

 

 

사실 백범과는 살인범으로 암약하기 이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백범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인연이 결국은 살인자와 피살자로 인한 악연으로 거듭나게 되었을 줄은  몰랐던 상황. 그리고 마침내 1949년 6월 26일 백범 선생을 알현하겠다고 하면서 백범이 기거하던 경교장을 방문하여,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는 백범을 향해 권총으로 4발을 발포하여, 백범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경교장을 빠져 나갔다. 이 때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급히 올라가 보니 백범이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고, 백범은 결국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 이전에는 서북청년회 극우회원으로 활동하여 공산주의자 및 반동자 색출에 나섰고 특무대장이었던 김창룡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국방경비대 포병 장교가 되었고 이승만과도 만난 적이 있었다. 

 

1949년 저격 당시 안두희의 나이는 32세, 백범은 73세로 안두희는 결국 젊은 시절에 백범이라는 일흔의 노인을 살해한 범죄자가 되었고 자신도 80살이 되어서야 당시 버스 기사였던 46세의 박기서에게 맞아죽게 되었다. 

 

김구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이나 미국 oss 또는 김창룡이라는 설이 있다. 육군헌병사령관을 지낸 임시정부 출신 장흥 퇴역 육군 헌병대령은 신성모가 배후라고도 주장한다. 원래는 장흥 대령이 그를 수사하려고 했으나, 김구가 임시정부 출신이고 장흥도 임시정부 출신이라서 수사를 못하게 되었다.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3달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50년 7월10일 대한민국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협을 당했다. 출소 뒤 동향 친구 사단장 이기건 장군의 배려로 육군에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1965년 곽태영에게 공격을 당해 언론에 안두희의 근황이 잠시 공개되었는데, 이 군납 사업으로 한때 강원도 내 납세액 3위를 기록할만큼 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의란 게 과연 있는 것이냐?"는 반응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 그러나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이후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 곽태영은 구명운동(안두희가"나를 찌른 곽씨는 의분에서 한 일이니 무죄로 해주고 그사람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라고 해서 5년형만 선고받았다. 1987년 3월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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