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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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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선거의 내용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부정선거 한국 헌정사 이래 국회의 의결을 통해 정식으로 무효 처리된 유일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로 한국 선거 사상 최악의 흑역사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부정부패로 가쁜 숨을 내쉬던 자유당 정권은 얼마 안 가서 4.19 혁명을 맞고 몰락한다.

 

1956년 3대 대선에서 이승만은 라이벌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병사하는 개인적 호재에도 본인 아래에서 장관직을 역임하여 농지개혁을 주도한 진보당 조봉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된다. 당시 결과는 이승만 약 500만 표, 조봉암 약 220만 표에 투표 당시 상망 상태인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약 185만 표나 나오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러자 국부로서 존경 받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그가 상심한 것은 당연한 일, 이승만에게 아부하기 바쁘던 자유당과 아첨꾼들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뚜렸한 대안 세 가지를 통해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어보고자 했다.

 

- 첫째, 평화 통일을 부르짖던 조봉암을 불법적으로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불법적으로 박살냈다.

 

-둘째, 자유당 정권의 처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언론(특히 경향신문)에 재갈을 물리는 신 국가보안법을 발동 시켰다.

 

-셋째, 민주당이 아직 대통령 후보조차 정하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던 1959년 3월부터 이미 새로 내무부장관이 된 최인규의 지도 하에 부정선거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최전선에 최인규가 있었다. 취임식 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다선되도록 해야 한다'라며 일찌감치 싹수를 보인 그는 전국 시,읍,면,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1 회씩 모여 득표 공작을 점검하고, 같은 해 5월부터 11월 까지 서울, 인천, 춘천, 대구, 광주 ,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측 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렇게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정작 1960년 대선 직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유세기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이로써 사실상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지난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내세웠던 이기붕이 보기 좋게 민주당의 장면에게 박살이 났었기 때문에 물론 부통령의 권한 자체에는 크진 않았지만 문제는 이승만 사후를 대비할 인물이 이기붕이었는데 야당에 또 박살이나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당시 이승만의 나이가 지금으로도 장수인 85세의 고령인데다가 건강 상태도 안 좋았기 때문에 자유당 입장에선 급할 수 밖에 없었다. 제1공화국 시절의 부통령은 이후의 국무총리와는 달리, 대통령이 사망하면 권한대행이 아닌 차기 대통령으로서 남은 임기를 수행하게 된다. 이승만이 워낙 고령이라 이때의 부통령선거는 사실상의 대통령 선거급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준비한 부정선거 계획이 부통령 당선을 위한 것으로 대신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다 1년 정도를 기다리고 마침내 시작된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과 그 떨거지들은 꾸준히 준비해온 자신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 하였다.

 

영구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에 '올인'한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예의 부정대출 커넥션을 동원했다. 그 결과 1000만환 이상의 선거자금을 바친 기업인들이 200여명, 총액은 70억환에 달했다. 또 도로사업비 등 정부사업예산에서 80억 환을 전용,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선거자금 조달작전에 앞장선 것은 바용익 자유당 총무위원장이었고 송인상 재무장관,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김영찬 산업은행총재, 김영휘, 배제인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동원됐다. 우선 12개 주요업체로부터 선거자금을 징수했다. 대한양회, 극동해운, 중앙산업, 경남모방, 동양시멘트, 삼호방직, 대한방직협회, 삼성물산 , 태창방직, 대한방직 등 주요 재벌들이 수억 환씩, 도합 21억환을 모금했다. 또한 산업은행은 산업부흥국채 인수를 핑계로 13개 업체에 42억 환을 대출해주고, 대출액의 30%내외를 선거자금으로 뜯어내, 총 17억환을 조달했다.

 

대한중공업 9억환, 대한양회 5억환, 기아산업 3억 5000만환, 조선방직 5억환, 락희화학 2억환, 한선기계 1억 5000만환, 한국나일론 2억 2500만환, 동립산업 7억환, 대한중기 3억환, 동신화학 2억환, 고려모직 2억환 및 극동연료 5억환 등이었다. 이것이 1958년의 연계자금 사건에 이어, 산업은행의 제2의 정치자금 의혹 사건이다.

 

 

부정선거 당시 그야말로 온갖 수법들이 나왔다. 이런 수작을 부릴 머리로 국정을 생각했더라면 애초에 이승만이 쫓겨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입수할 수 있었던 부정선거 관련 문서에 나온 정황들이다.

 

-사전 투표: 일정 비율의 표를 사전 투표해서 투표함에 채워 넣는 방식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시계를 조작하거나 핑계를 대어 자유당 쪽 참관인이 야당측 참관인을 몰아내고 그 사이에서 투표를 조작했다. 만약 말을 안들을 경우 납치, 폭행으로 대응했다. 참고로 이것은 조봉암 대 이승만 대결 구도였던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3인조, 5인조 투표: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며 3~5인씩 한 조로 투표하게 한 것, 이 3인조는 모의 투표까지 실시했었는데 일찍이 도시화가 진행되어 정치 색이 짙었던 당시 마산 시민 입장에선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7인조 투표도 있었다고 한다.

 

-뇌물 살포 및 협박: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대대적으로 뿌리고 , 또한 이른바 '어깨'들을 동원해 유권자들을 협박했다.

 

-강령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선거인 명부에 올렸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자유당을 찍게 되었다.

 

-올빼미표 : 어둠을 틈타 개표통을 바꿔치기하는 수법

 

-피아노표:  당장 개표장에서 일어난 부정행의 수법으로 부정개표가 얼마나 지능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여주는 사례, 이승만을 찍지 않은 표를 미리 매수된 개표원이 책상 아래에 떨어틘 척 하며 책상 아래로 들어가 양 손가락에 지장을 듬뿍 찍은 채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사정 없이 찍어서 무효표로 만들었다.

 

-샌드위치 개표 : 개표할 때 다른 후보를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 한 장씩 이기붕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의 표라 집계하거나 아예 검표하지도 않고 몽땅 이기붕의 표로 집계하는 방법

 

선거 결과 당연히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는데, 문제는 선거 조작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이기붕의 득표율이 115%에 육밥하는 사태가 발생해고, 이에  당황한 자유당이 "야, 너무 많다 .줄여,줄여"하고 지시를 내려 이승만 80%, 이기붕 70%로 적당히 줄여서 발표하는 말도 안되는 촌극이 빚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민들이 바보가 아닌 딴에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수 밖에 없었고, 바로 선거 당일부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시위는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시민들이 줄줄히 들고 일어나면서 4.19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3.15 의거는 2010년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마산(현창원시)에서는 관련 행사가 열렸다. 현재도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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