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1931년 9월 18일 만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지역을 '만주국'이라 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내륙으로 공격할 빌미를 찾고 있던 차에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작은 돌다리인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일어난 작은 사건을 빌미로 일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다리 위에서 사라진 일본군 사병으로 말미암아 확대된 사건은 일본의 조작이었고 중국을 공격하면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동북아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도 '루거우차오사건'또는 '지나사변'이라 하여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전쟁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이것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치 '아시아 혁신'의 사업인양 거짓으로 꾸민 일본정부의 책략이었다.
이 전쟁은 기존에는 흔히 무능했던 중국군을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털고 또 중국군은 그냥 자신들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덕에 종결된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실증적, 수정주의적 재평가로 인하여 점차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러시아야 전후 서방 진영과 냉전을 벌였던 게 원인이었고 냉전 종식 후 재평가가 이뤄졌지만. 중화민국은 전후 국공내전에서 패해 본토에서 밀려나 버리고 중국 공산당의 사관이 주류가 되어 중국 국민당을 저평가하며 이것이 외국까지 퍼지면서 재평가가 굉장히 늦었다.
루거우차오에서 시작된 일본의 공격은 이후 베이징.텐진을 점령하고 일본은 전쟁을 상하이로 확대시키고,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무고한 시민 수십만을 잔인하게 살육하고 여성들을 강간하고 약탈하였다. 그 뒤 우한을 공략하고 광둥에서 산시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였다. 한편, 중국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혼란을 거듭하였으나, 일본의 공격을 먼저 막아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국공합작을 이루면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본격적인 항전을 시작하였다. 중국군의 유격전에 따라 일본군은 광범한 전선에서 '점(도시)과 선(도로)'을 유지하는데 불과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일본군은 삼광작전등 잔학행위로 전쟁 전기간에 걸쳐 중국인 1200만 명을 죽였으며, 중국 민족 그자체를 적으로 여기는 전쟁처럼 많은 중국인을 살육하였다. 일본은 수백만의 대군과 온갖 근대병기를 동원하는 한편, 왕자오밍등의 친일 정권을 수립하여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중국 민중의 항전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며 중국의 국공합작으로 전쟁은 장기화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태평양을 넘어 미국 화와이 지주만을 기습하였다. 이리하여 중·일 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고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승승장구 하던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참패를 당하면서 사기는 저하되고 군기도 문란해졌으며,105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이미 제2전선이 되어버린 중국 전선에 못박혀 있음으로써 제구실을 못한 채로, 1945년 8월15일 포츠담선언 수락과 더불어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