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 독재자,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이다. 공화국 프랑스를 쿠데타로 집어삼키고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다는 점에서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고 유럽 전부가 휘말리게 된 전쟁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평가가 많지만,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시작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며 당대 세계적 강대국들이 몰려 있던 유럽을 석권하고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다. 카를 3세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며 나폴레옹 법전과 나폴레옹 전쟁 등의 여러 업적과 사건으로 세계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가 전쟁의 신 그자체라고 불러지게 된것은 그의 타고난 군사적 재능에 있다고 볼수 있다.
그의 전술적 능력은 시대를 앞서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그의 용병술을 모방하기 바빴다. 군재 하나만은 역대 최고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던 그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강국(영국,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러시아 등)들은 7차례에 걸친 동맹(대프랑스 동맹)(1차대 프랑스 동맹은 애초에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혜성같이 나타나 대불동맹군을 격파 하였고 결국 1차 대불동맹은 와해 되었다.) 을 해야만 했다. (그가 일으킨 전쟁들에 대해선 나폴레옹 전쟁 참조)
포병장교는 수학적 계산능력과 탄도학 등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인재들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포병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그 엘리트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다. 그랑제꼴 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에꼴 폴리테크니크부터가 원래는 프랑스군 포병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이때문에 상당수의 포병 장교들이 혁명이 발생하자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나폴레옹은 드물게도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군사 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며 제대로 훈련받은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하기를 주저함이 없었기에 인망이 높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적어도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는 엘바섬을 탈출했을때 그를 잡으러 간 군대가 오히려 힘차게 랑펠로를 외치며 그의 휘하로 흡수된 사건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포병장교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병/기병/보병의 조화와 협동을 이용한 것으로 포병이 먼저 공격하고 기병이 휩쓸고 그리고 보병이 공격하는 형태를 이루어 병과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병과간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워털루에서 패배했다는 게 인기 있는 분석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지병인 치질이 악화되어 하루 종일 엎드려있어서 잠도 자지 못하여 (심지어 고통 때문에 주치의에게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다.) 정상적인 지휘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란, 뮈라, 마세나, 베시에르, 베르티에, 모르티에,다부 등 나폴레옹을 훌륭하게 보좌했던 유능한 원수들이 전부 빠졌다. 워털루 전투 시점에서 란, 베시에르 , 베르티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뭐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기여한 전력 때문에 합류를 거절 당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합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 두었다. 이런 여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두었다. 이런 여러 악재로 인해 기병과 포병이 따로 놀게 되어, 기병은 사지로 돌격하고 포병은 같은 편의 기병에게 포격을 가하는 촌극이 연출되게 되었다. 기병대를 맡은 미셸네는 포병과의 협력 없이 혼자 돌격해서 기병을 격파하고 엠마누엘 그루시도 나폴레옹이 원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등 난장판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술트는 참모로서 재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프로이센 군을 추격, 섬멸하는 임무를 맡은 그루시는 처음부터 원수감이 아니었다. 기병을 지휘한 네는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기병의 천재였던 뮈라와 달리 기병 운용능력이 평범했다. 뮈라는 지성은 보잘것 없었지만 언제, 어디로 기병대를 돌격시켜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어 기병지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 네는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 전략적인 판단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워털루 당시의 네는 이중배신을 한 입장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뮈라가 나폴레옹의 기병을 다뤘다면 , 오히려 프랑스가 이겼을 거라는 의견이 큰힘을 얻고 있다. 사실 워털루 전투에서도 끝내 주요 요충지를 함락시켜 아서 웰즐리가 후퇴를 고려하고, 나폴레옹은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문제는 그루시가 아직도 올 생각을 안하는데
나폴레옹이 익힌 군사 기술과 제병 합동 전법의 재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사기 또한 높았던 혁명기 프랑스의 병참 제도 하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당해낼 장군이 어디에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적들도 인정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전술보다 전략 및 작전술에서의 능력이다. 작전술이라는 개년자체를 정립한 것은 나폴레옹인데, 작전술이란 (전략지침에서 제시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련이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며, 전술적 수단들을 결합 또는 연계시키는 활동)으로 쉽게 설명해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술들을 결합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으로 손자병법의 이상적인 조건인 '이겨놓고 싸운다' 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다. 즉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 부대를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유리한, 원하는 장소에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을 가장 잘 실천했고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사실 그 전에도 당연히 병법에서 굳이 아군이 적군보다 적은 수인데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적을 분리시켜서 아군보다 적은 단위로 만들고 각개격파하는걸 이상적인 상황으로 상정하긴 했었다. 이를테면 명나라의 10만 원정군을 4길로 나뉘어서 진격해오는걸 보고 4만에 불과한 후금 군대가 바로 각개격파한 것처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움직일 줄 아는 지휘관들은 이런 전술을 애용했다. 다만 나폴레옹은 단순히 적군이 알아서 분리되었을때 바로 기회를 잡는 수준도 또 결전이 필요한 순간에는 바로 결집해서 각개격파를 하는 기술을 매우 잘 선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옹의 병참술은 혁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현지징발의 방식으로 시작해서 보급소와 분배소를 설치하고 수송수단을 도입하면서 상설보급이 가능하도록 했다.
나폴레옹이 한 말로 알려진 "폐하께서는 항상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을 이기셨습니다."라고 부하가 감탄하자" 아니다 나는 늘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를 이겼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 오스트리아 등 대프 연합군에 비해 처음부터 수적 우위를 차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교전상황에서만큼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당대에 전술적인 면에서 나폴레옹과 맞서볼만한 인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전략과 작전술에서는 그를 따라갈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었던 백일천하 때조차, 전략 및 작전술 단계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웰링턴마저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낚여 허겁지겁 병력을 집결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업적을 쌓기 위해 나폴레옹은 건강을 희생하였가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토막잠 전설에서도 알수 있지만, 군무로선 공부로건 소싯적으로 워낙 과로하는 편이었던데다 성장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과민 증세도 있었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병영 생활이라는 것이 원체 개판이었던지라 열병, 위궤양과 탈장, 치질 등의 여러가지 병을 앓아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소년 장교 시절부터 내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체질적으로 위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이때문에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한쪽 손을 배 부위에 넣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것을 배가 아파 초상화를 그리는 도중에도 문지르는 모습이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지만 이는 다른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화에도 등장하는 포즈로 관련없는 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