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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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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중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이 패전국 바이마르 공화국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무자비하게 뜯어내려한 조약이자 동시에 평화를 위해 만들었으나 실상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 조약이기도 하다.

그 골자는 엄청난 양의 보상금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장해제(최소한도로 필요한 군사력만 보유 가능)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1차 대전 동안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등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변화된 세계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유약한 조약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새로운 광풍을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18년 9월 독일 군부가 사실상 패전을 내각에 알리고 11월 11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연합국은 독일의 휴전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간주하고 독일군을 뒤쫒아 독일 국경을 돌파해서 라인강 지역까지 추격하고 영국 해군은 휴전 후 협상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독일 항구에 기뢰를 매설했다. 1919년 초부터 본격적인 협상인줄 알았는데 훼이크고 사실상 항복 후 요구조건을 명령하고 관철시킨 것 ,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반발했지만 이미 반항할 여건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수용한다. 승리한 연합국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씨가 마를 때까지'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은 전장이 되었던 벨기에와 프랑스의 주민들에 대한 피해 배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연합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에 대해서도 배상할 것, 이라고 나서면서 300억 마르크가 2000억 마르크 대로 치솟게 되었다. 한편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이상인 국제연맹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엿보았고, 결국 조약의 첫 조항은 국제연맹에 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국제연맹 문서에서 보듯 현실은 암울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있으며 황제와 군부핵심인사를 포함한 전범 800명을 인도할 것

 

-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할 것, 모든 식민지를 포기할 것

 

- 벨기에에 오이펜-말메디, 폴란드에 포젠, 서프로이센을 양도할 것, 덴마크 접경 슐레스비히 북부, 폴란드 접경 상슐레지엔 및 동프로이센 남부는

  즉시 주민 투표로 , 프-독 접경지대 자를란트 지방은 탄광권을 15년 동안 프랑스에 넘긴 후 국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할 것, 독일계 주민이 많은 단치히는 국제연맹 자유 도시로 정할 것

 

- 라인강 이서 지역 전부와 라인강 동쪽 60킬로미터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병력배치를 금지

 

-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 기준으로'배상할 것

 

- 육군의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하며 징병은 금지한다.

 

- 바이마르 공화국은 대포 5,000 문과 비행기 25,000대를 양도한다.

 

- 전차,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 전부등 최신 무기의 보유를 일체 금지한다.

 

- 해군의 병력은 1만 5천, 군함은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노후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전함 6척으로 제한한다. 잠수함도 금지

 

- 사관학교 폐지 참모본부도 폐지

 

-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들과 다시는 연합하지 말 것. 하지만 이 조약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반강제적으로 합병하면서 깨지고,1939년대 뮌헨 조약으로 최대한 전쟁을 기피하려 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 지역 역시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사실 이 조약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또한 그 당시에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토론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 GCSE 역사 교육과정에서는 아예 제1차 세계 대전 대단원 하나를 "Was Treaty of Versailles Fair?(베르사유 조약은 평등한가)라는 문장으로 대표하고 있다.

 

다른 패전국 사이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생 제르맹 조약, 헝가리 왕국과 트리아농 조약, 불가리아 왕국과 뇌이 조약, 오스만 투르크 제국 사이와는 세브르 조약이 줄지어 체결되었다. 모두 비슷하게 영토 할양 제국 해체 군비 제한 등의 내용이다.

 

1,320억 마르크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으로 ,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가능액 20억 달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금액을 특히 미국으로부터 진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쥐어짜려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영원히 구제금융 국가, 부채국가로 만들겠다는 속셈인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약을 강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탄 군부가 아니라 냉철해야 할 정치인들이었다. 케인즈는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에 못 받고 영국 프랑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받아봤자 미국에 도로 전쟁 때 얻은 빚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증오와 정치적 혼란만을 일으킬 바에 아예 배상금을 탕감하자고 주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혼자 귀국해버리고 그 길로 재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베르사유 조약과 연합국 정치인들을 깠다.

 

 

 

군대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통제해야 하므로 세세한 항목까지 설정했다. 그래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허락된 10만의 군대를 부사관과 장교 위주로 해서 정예화하고, 전차나 전투기 등의 금지된 무기는 소련과 밀약 하에 소련 영토에서 공동개발하거나 농업용 트랙터 등으로 위장시켜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대공포 등 일부 병기는 조약의 맹점을 이용하여 1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18년에 개발했다고 주장해서 생산 및 개량을 허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국의 제한은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은 현역 병력은 많으나 예비 병력의 경우 그 숫자도 적고 기초훈련도 안돼서 노역자 이외에는 써먹을 수 없는데, 이는 군대의 장기간 소규모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수 공업도 상당기간 묶여 있어서 화포나 전차의 수준도 연합국에 비해 낮았다. 해군의 경우에도 공산정권이 들어선 소련와 과도한 배상 및 군비 제한을 요구하는 프랑스에 질린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8척 보유 정도로 제한할 것을 생각했다. 허나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화가 난 영국 총리는 해군 군비를 대폭 축소시켜 버린 탓에 대형함의 건조가 10년간 끊어져서 이후 해군을 재건할 때 설계한 군함마다 대부분 1차대전시의 물건에 약간의 개수를 한 형태일 정도로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고, 결국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건조가 빠르고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 위주로 해군을 건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치가 집권해 다시 한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근간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분노한 독일 국민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침공같은 삽질이 없었더라도 다시 한번 1차대전급 대전쟁을 만들었을,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피를 불러온 엉터리 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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