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3.1운동 ! 유관순을 기억하라!

반응형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 된다. 3.1절 3.1운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유관순이다.

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에 걸쳐 한반도와 세계 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 일본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저항권을 행사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3.1 독립선언 , 3.1혁명 , 3.1만세운동 , 기미 독립 운동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참가자들은'대한 독립 만세'라는 구호를 앞세워 일본 제국의 무단통치를 거부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민중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시위가 끝난 뒤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각종 후원회 및 시민 단체가 결성되었고, 민족 교육 기관, 조선의 여성 동우회와 근우회 등의 여성 단체, 의열단 등의 무장 레지스탕스, 독립군이 탄생했으며 종내에는 현대 한국의 모체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낳은 운동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계기이고 헌법에도 계승하고 있음을 명시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운동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한국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힐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에서도 중요히 여기는 사건이다.

 

 

 

유관순은 어떻게 3.1운동을 참가 하게 되었을까?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의 3남2녀중 차녀로 태었다.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인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계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만세운동 와중에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 구형을 받는다.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져서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으로 증형되었으나.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듬해 4월 ,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월로 감형되었다.

 

 

이후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체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는 유관순의 석방 예정 일자였던 10월 1일에서 딸 이틀 전이었다고 한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도 아니고 아예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아니면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일본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데 ,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녀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다. 다만 근현대사학자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체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체를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

 

결국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루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혀다. 그러나 일본이 그 후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 했다. 이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유관순이 아우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 지휘하긴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운동의 아이콘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남한의 고위직을 역임하고 야당의 총수가 된 조병옥 선생의 부친이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 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만들어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전야제를 개최한다.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