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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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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약산(若山)이다. 1918년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하였고,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중국구민당의 동의를 얻어 '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 · 15 광복 후 귀국 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그 후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을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 제거 작업 때 숙청되었다.

 

 

긍정적 평가

 

김원봉은 항일무장투쟁 노선으로는 절대 빠질수 없는 중요한 사건을 도맡았으며, 이분의 거취에 따라 무장투쟁세력들의 판도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묻혀버렸고,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공헌한 공산주의자로 인식되어 독립운동 경력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감이 있다.

 

근래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린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이 출제가 되면서 입시를 위해서라도 김원봉을 기억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리고 영화 암살과 미정 등 대중 매체에서 조금씩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김원봉의 업적이 재조명 받고 있다.

 

참고로 김원봉이 항일무장투쟁을 할 당시 일제가 김원봉에게 100만원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당시 100만원을 오늘날 환산하면 약 320억 정도라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이 60만원 이었던것을 감안하면 항일무장투쟁에 있어서 김원봉의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북한에서 활동하긴 했으나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는가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주장이 많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할 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는 김원봉과 오랜 시간 애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황용주에 따르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상웅도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로,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게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할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김원봉이 활동한 의열단은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더 강한데,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에 무정부주의자였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북한 정권에서 직책을 역임할 때도 상당히 온건하고 치우지지 않은 성향을 보여 6.25전쟁 때 납북된 정치인들을 최대한 도와주었다고 알려지며, 휴전 이후에는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

 

한국 광복군의 장준하는 김원봉이 미인계 사용을 일삼았다고 말했다. 정화암은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는지요, 그래서  그 첫번째 아내도 완전히 성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김두봉의 조카딸도 마찬가지 입니다. " 라고 말하며 김원봉이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고 이때 얻은 병 때문에 본처 최씨와 두번째 부인인 박차정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시정부 내 보수세력인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라고 말하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장준하 역시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 라고 말하며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지목, 비난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 역시 비판했다. 일본군을 처음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김원봉과의 연대를 거절하자 김원봉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때 장준하는 김원봉이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햇는데, 여기에서 장준하는 또다시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증언했다. 장준하는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 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 공작을 시작했다.' 라고 그의 저서 돌베개에 기록했다.

 

또한,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김원봉이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김원봉이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라고 말했는데,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 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김원봉은 자원입대 또는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의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 라고 보았다.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했다.

 

또한, 월북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고, 북한 정권에 부역하여 대한민국에 직접적 피해를 주었는데, 국가검열상에 있을 때 6.25 도중 간첩단을 파견한 것이다. 실제로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우리 당국이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선거를 방해하고 경제 혼란을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의 신문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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