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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나폴레옹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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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나폴레옹의 전성기

 

 

 제1통령으로서 나폴레옹은 자신이 원로원의 의원을 임명하고, 육·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군대 통수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나폴레옹은 첫 작업으로서 1801년 교황과 종교 협약을 맺었다. 혁명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가톨릭은 다시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신앙이 되었으며 교회는 국가 질서에 편입 되었다. 

 

 다음 작업으로 나폴레옹은 혁명 중에 제창되었던 사항들을 제도화하기 위해 법전을 편찬하였다. 1800년 이래 민법전의 초안 작업이 시작되어 1804년 3월에 법전이 공포되었다. 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리는 이 법전은 법 앞에서의 평등, 신앙의 자유, 봉건적 특권 폐지 그리고 프랑스 가정과 가족 간의 사적인 소유권과 가족법에 대해 36개의 법과 2,281개의 조항으로 잘 정립해 두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나폴레옹 통치 시기 민법전 편찬만큼이나 중요했던 성과는 교육제도의 정비 작업이었다. 황제 즉위 당시 학교와 교수가 부족하였으므로 나폴레옹 통치 시기에는 새로운 형태의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국가가 모든 학교들을 관리·감독해가는 근대적 교육의 틀이 마련되었다. 이 밖에도 나폴레옹은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였고, 혁명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다시 사용했으며 세심한 조치에 따라 조세를 부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의 독점을 타파하고 부패를 척결함으로써 혁명기 제시되었던 문제를 개선하여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통치 작업들이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으므로 1802년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직에 오르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마침내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357만 표의 지지와 2,569표의 반대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 변방 코르시카의 보잘 것 없는 어린 소년이 차별과 역경을 이겨내고 프랑스로 건너온지 25년 만에 거두었던 쾌거였다. 그는 안으로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밖으로 연대하여 프랑스를 침공해오는 대불동맹 군주국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는 후에 "나는 언제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제정 체제는 사실 일종의 공화제이다. 국민의 요청으로 지도자가 된 나는 출생 신분이나 재산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회고하면서 자신의 통치에 대한 신념을 변호하였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추대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방어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황제 대관식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을 향해 프랑스 영토를 넓혀갔던 침략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1793년 1차 대불 동맹을 시작으로 7차까지 대불 동맹을 결성하며 프랑스를 압박하던 유럽 군주국들을 상대하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을 단결하게 하였고, 프랑스 국가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추대된 바로 다음해 1805년 10월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승리하였고 12월에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에뚜알 개선문

 

 연이어 1806년에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한 후 베를린에 입성하여 16개 연방을 라인 동맹으로 편성하였다. 1807년에 프로이센 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틸지트 조약을 맺어 프로이센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에 베스트팔리아 왕국이 세워지고 프랑스 세력은 라인 강 오른쪽까지 확대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에 로마식 개선문을 축조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파리 관광객 모두가 찾는 명소 에뚜알 개선문이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난 12갈래의 거리 이름은 당시 나폴레옹이 승리했던 전투 이름 혹은 장군의 이름을 붙혔던 것이다.  이후 1812년 러시아 원정 이전까지 나폴레옹의 군대는 라인 강, 알프스 산맥, 피레네 산맥 넘어 유럽 전 지역에서 깃발을 꽂으며 그 명성을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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