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체면을 살리다

반응형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체면을 살리다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이래 영방 국가로의 분열 체제를 지속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30년전쟁은 제국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하여 제국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았다. 이 전쟁은 제국 내에 신구교간의 종교적 대립으로 시작되었지만, 다른 나라들이 개입하면서 열강들의 유럽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국제전쟁으로 발전했다. 

 

베스트팔렌 회의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막을 내렸는데, 그 결과 제국 내의 신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었으나, 신교도를 지원한 프랑스와 스웨덴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수많은 제후국들이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인정 받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일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방 국가인 동부의 프로이센과 동남부의 오스트리아는 비교적 전쟁의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이후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은 13세기경에 십자군전쟁에 가담했던 제국의 기사단이 황제의 허락을 얻고 정착하여 세워졌는데, 18세기초인 프리드리히 1세 때에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화가 확립되어 절대주의 체제가 성립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시기에는 더욱 성장하여 유럽 최대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프리드리히 2세

 

 

 그는 프랑스로부터 도망해 온 위그노들에 대한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펴면서 그들은 이용하여 경제 발전을 도모했고, 관료제의 정비와 상비군의 확장을 통해 동유럽 특유의 군국주의적 절대왕정을 확립했으며, 고문 제도를 폐지하고 산업을 장려하는 등의 계몽 정책을 실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전쟁을 통해 철과 석탁이 풍부한 공업의 중심지인 슐레지엔 지방을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절대주의는 근대 초기에 오히려 농노제가 강화되었고, 대농장을 경영하는 자주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자유로운 상공업을 억압하여 시민층의 성장을 가로막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한편,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한 나라였는데, 게르만인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인 헝가리인 등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해 통일적인 발전이 더디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이후 국내 산업의 육성은 물론 농민의 보호에도 노력하는 등 인간적인 계몽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더욱 적극적인 근대화를 추진하여 농노의 해방을 통해서 영주 세력을 억제하는 한편,교육의 보급, 고문 ,사형의 폐지 등의 계몽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독일인을 중심으로 전 국토를 통합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기에 봉건 귀족의 반발은 물론,다른 민족의 반항을 불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