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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네이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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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네이아 전투

 

 

 스파르타는 양국의 동맹국들과 별도로 아테나이와 50년 동안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체결하게 된 데는 절박하고 직접적인 두 가지 동기가 작용했다. 스파르타의 목적은 아테나이로부터 필로스와 약 300명의 인질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아테나이는 스파르타로부터 암피폴리스를 돌려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코린토스와 엘리스의 의심을 부추겼다. 그나마 테바이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과두제를 선호하는 스파르타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그들의 권력 유지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반스파르타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그들의 권력 유지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반스파르타 협약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니키아스 평화조약에는 꿋꿋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지켰다. 

 

 

 그리고 기원전 420년에 새로 구성된 에포로이 중 브라시다스의 호전적인 경향을 이어받은 두 명의 에포로이로부터 다소 놀라운 지지를 받았다. 아테나이는 스파르타에 인질들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암피폴리스를 돌려주지 않았고, 아테나이 역시 필로스를 돌려주지 않았다. 스파르타에서는 주전론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고, 아테나이에서도 알키비아데스의 선동으로 주전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알키비아데스라는 이름은 스파르타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크세니아 관계를 통해서 아테나이의 귀족이던 알키비아데스의 부계 쪽으로 도입된 스파르타식 이름인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50년경에 태어났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인 페리클레스와 그의 정부인 아스파시아의 집에서 자랐다. 정치색이 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알키비아데스는 일찍감치 정계 진출에 대한 야심을 불태웠고, 아테나이에서도 이르다고 생각될 법한 20대 후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정치 무대에 오르기 위한 서툰 시도를 했다. 

 

 그 과정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조부가 스파르타와 유지했던 프로크세니아, 즉 공식 대표 노릇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장자를 우대하는 스파르타인들은 알키비아데스를 거부했고, 이에 격분한 알키비아데스는 한동안 반스파르타 노선에 서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의 대립을 부추겼다. 

 

 아테나이의 반스파르타 행보에 따라 기원전 418년에 결국 만티네이아 전투가 벌어졌다. 아테나이는 아르고스의 민주 동맹국들과 스파르타에 반기를 든 펠로폰네소스 도시 만티네이아와 연합하여,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중무장군에 맞섰다. 아테나이 전쟁을 기술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만티네이아 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중 일례를 들면,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아테나이 측의 중무장 병사들이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중무장 병사들은 으레 그랬는데, 투키디데스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혔다. 

 

 

 

중무장 병사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노출되어 있는 오른쪽을 

 

옆 사람 방패의 보호하에 들어가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방패들을 되도록 가까이 대서 벌어진 틈이 적을수록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만티네이아 전투는 "그리스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계속된 대전"이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고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필로스에서 어처구니없이 패배한 것 때문에 스파르타인들을 향해

 

겁쟁이라느니 다들 무능력하고 굼뜨다니 하던

 

그리스인들의 온갖 비난이 이 한 번의 전투로 말끔하게 사라졌다. 

 

운명이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전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위의 말은 엄밀히 따져서 정확하지 않다. 첫째, 만티네이아 전투는 스파르타 시민들이 처음으로 페리오이코이 중무장병들과 같은 연대로 편성되어 치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스파르타인과 페리오이코이가 뒤섞인 연대 편성 외에도, 스파르타는 스키리티스라는 라코니아 북쪽의  병경 지역에서 모집된 특수한 페리오이코이 병력에 의존했다. 그들이 전에도 모집되어 스파르타군에 배치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서에서 그들이 언급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어쨋든 변경 지역의 페리오이코이를 병력으로 모집했다는 사실은 스파르타인들이 변경 지역의 안전에 대해 새로이 각성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세 번째 이유도 앞의 두가지에 비해 중요성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스파르타가 헤일로타이 출신의 중무장병들, 즉 브라시데이오이와 네오다모데이스를 처음으로 정규군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위의 말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다른 도시에서 모르기를 바랐겠지만, 만티네이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군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델의 군대였다. 

 

 아테나이는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뒤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했다. 독불장군 알키비아데스에게 이끌렸는지 아니면 홀렸는지, 기원전 415년 아테나이 의회는 새로운 전선을 열러 아테나이 전쟁과는 다른 별도의 전쟁을 시작하자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아테나이 측에는 치명적으로 그 두 전쟁이 이내 한 지점에서 교차하게 되었다. 

 

 기원전 415년에 아테나이는 시켈리아 섬을 정복하기 위해 해외 출정을 감행했다. 주요 표적은 시라쿠사이였다. 시라쿠사이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코린토스의 도리스족 정착민들이 세운 도시로, 한동안 참주들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460년대부터 미주 체제가 되었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15년부터 413년까지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을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시라쿠사이와 아테나이라는 두 맞상대의 유사점 때문이다. 

 

 만티네이아 전투처럼 시켈리아에서의 전투 또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 되었고, 갈수록 아테나이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아테나이의 불행을 자초한 주요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였다.  알키비아데스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시켈리아 원정을 주장했고, 아테나이인들이 그를 신성모독죄로 소환하려고 하자 배에서 달아나 하고많은 도시 중에 스파르타로 감으로써 조국을 배신했다. 그 뒤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인보다 더 스파르타 사람처럼 행세를 한다느니, 아기스 2세가 없는 틈을 타서 그의 아내를 유혹해 임신시키고 아들을 낳게 했다느니 하는 별의별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소문만 난무했을 뿐 사실로 드러난 것은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약점을 이용할지를 스파르타인들에게 조언함으로써 아테나이에 치명타를 입혔다. 스파르타가 아테나이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시라쿠사이를 지원하기 위해 진취적인 장군 길리포스를 보낸 것도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시라쿠사이는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아테나이의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스파르타는 기원전 413년에 아테나이 본토의 변경에 있는 데켈레아를 점령하고 주둔군을 배치했다. 

 

 

 기원전 413년에 아기스 왕의 지휘로 데켈레아에 구축된 요새는 육로를 통한 아테나이 전쟁이 최후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뜻했다. 그런데 육상 전쟁의 고수인 스파르타가 아테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해상전을 통해서였다. 스파르타가 해상전에서 승리를 거둔 데는 페르시아의 지원 덕이 컸다. 아테나이의 오랜 적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2세가 서방으로 보낸 두 명의 사트라프, 즉 북쪽의 파르나바주스와 남쪽의 티사페르네스를 통해 재정 지원을 해준 것이 스파르타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서 보내준 금으로 처음에는 아테나이 해군에 맞설 수 있는 함대를 만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적의 아테나이 해군을 능가하는 해군력을 구축했다. 

 

스파르타에 싫증이 난 알키비아데스는 동쪽 무대로 옮겨가서 또다시 아테나이에 피해를 끼쳤다. 그러나 기원전 411년경, 알키비아데스는 조국을 위해 명예로운 선지자가 되기로 결심한 듯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그해 아테나이는 민주제에서 극단적인 과두제로 바뀌면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 혼란을 배후에서 야기한 사람은 안티폰이라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아테나이의 중무장 병사들은 새로 등장한 과두 체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최빈민층의 아테나이인들로 병력이 구성된 함대는 과두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 함대의 에게해 기지가 사모스 섬이었다. 아테나이의 새 과두 체제 대표들은 사모스 섬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반대하는 함대 측에 페이라이에우스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그때 마침 사모스 섬에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만일 아테나이가 그곳을 이탈하면 해상 장악력을 잃게 되리란 것을 간파하고, 함대 지휘관들에게 사모스 섬의 기지에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다. 투키디데스는 이 일을 두고 알키비아데스가 처음으로 아테나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고 비아냥거린다. 

 

 아테나이가 해상 권력을 유지하면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요충지를 지배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아테나이의 해군 동맹국들이 계속해서 탈퇴하고 저항하는 것은 막아내지 못했다. 기원전 411년에 에우보이아, 키오스, 타소스 등의 섬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아테나이에 맞섰다. 아테나이는 간신히 에우보이아를 다시 동맹 안으로 끌어들였으나 키오스와 타소스는 끝내 이탈하고 말았다. 그로써 아테나이의 주요 동맹국중에서 사모스 섬만이 아테나이의 민주제를 지원하는 도시로 남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기원전 407년에 페르시아의 키루스와 스파르타의 비범한 장군 리산드로스가 연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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