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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다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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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다스의 생애

 

 

 레오니다스 1세는 기원전 54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는 부왕 아낙산드리다스와 첫 번째 아내 사이에 태어났지만, 적법한 후계자는 아니었다. 중혼이 분명한 두번째 아내에게서 클레오메네스가 태어난 뒤에 아낙산드리다스는 마침내 첫 번째 아내에게서도 세 아들을 얻었는데, 도리에오스, 레오니다스, 클레옴브로토스였다. 헤로도토스는 레오니다스의 부왕 아낙산드리다스의 중혼은 '스파르타인답지 않은 것'이라고 평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만, 기원전 520년경 아낙산드리다스가 사망한 뒤 클레오메네스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 그런 사실이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레오니다스가 기원전 540년경에 태어난 것이 맞다면, 보통 스파르타 기준으로 기원전 510년쯤에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니다스는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을 했다가 사별 또는 이혼을 했거나, 아니면 세상에 알려진 대로 기원전 490년대 후반에 고르고와 처음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이복형의 딸인 고르고는 무남독녀 왕녀로 부왕의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년였으므로, 스파르타 여성의 결혼 적령기인 10대 후반이 될 때까지 레오니다스가 고의적으로 결혼을 미루었을 가능성도 있다. 

 

 경제적인 목적은 물론 왕가의 결속을 위한 결혼을 위해서 말이다. 기원전 490년 혹은 489년에 레오니다스의 이복형 클레오메네스 1세가 미심쩍은 자살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은 물론 아기아드 왕위 문제를 매듭지었다. 과연 그가 스스로 죽음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클레오메네스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이 레오니다스였을까? 국왕이 살해되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을 때 의심의 눈길이 레오니다스를 향했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레오니다스가 클레오메네스의 죽음에 연루된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거나 혐의가 있었다면, 10년 뒤에 그가 테르모필라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선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레오니다스는 고르고와의 사이에 플레이스타르코스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로써 300명의 최정예 전사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테르모필라이로 출정할 300명을 선발하는 기준에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는냐의 여부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오니다스가 에우리폰티드가의 공동 왕 레오티키데스를 제치고 스파르타 선발대를 이끌고 출정할수 있었던 것은 아들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뒤 지휘관으로서 보여준 레오니다스의 행동은 스파르타의 결정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증명해주었다. 

 

 

 레오니다스의 행동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없었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레오니다스가 했다는 재기 넘치는 명언은 그의 유머 감각을 잘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로부터 무기를 버리고 페르시아군에 굴복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레오니다스는 단 두마디로 대답했다고 한다. "와서 가져가라." 또한 테르모필라이 전투의 사흘째이자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되는 날 동이 틀 무렵 부하들에게 "아침을 든든히 먹어라. 오늘 저녁은 저승에 가서 먹게 될 테니 "라고 말하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 말을 통해 당시 스파르타에서 하루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공동 식사가 저녁에 실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의 사흘째이자 마지막 날, 호메로스가 묘사했던 것과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레오니다스의 시체가 페르시아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스파르타 전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던 순간이었다. 그때 스파르타 전사들은 트로이아 전쟁에서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  아킬레우스와 함께 온 힘을 다해 시신을 지켰던 그리스인들과 같았다. 하지만 스파르타 전사들은 레오니다스의 시신이 페르시아군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토막 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가 밝힌 일화는  그게 사실인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한 다혈질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의 시체를 토막 내어 복수를 하자고 제안하자 총지휘관인 파우사니아스는 냉담하고 무뚝뚝하게 그리고 감탄스럽게도 그런 복수는 그리스식이 아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레오니다스의 시신이 실제로 훼손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40년 뒤에 그의 유해가 스파르타로 옮겨졌고 장례식이 다시 치뤄졌다. 또 스파르타는 기원전 480년 직후에 레오니다스가 죽음을 맞은 장소에 돌사자를 세워 영원히 그를 기억하게 했다. 

 

 

 보통 스파르타인이 해외 출정 중에 전사하면 그 장소에 묻히고, 고향에서는 어떤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간략한 정보만을 담은 묘비로 무덤을 대신했다. 왕의 유해는 밀랍이나 꿀로 방부 처리를 한 뒤 스파르타 땅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레오니다스의 경우에는 시신 대신 가짜 형상이 준비되었다. 레오니다스의 장례식은 특별하고 장엄하게 치러졌다. 견문이 넓었던 헤로도토스가 보기에도 레오니다스의 장례 의식은 전통적인 그리스 장례식이라기보다는 이방인, 특히 스키티아의 전통과 비슷해 보였다고 한다. 

 

 장례식을 위해서 스파르타인들은 먼저 기수들을 동원해서 스파르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애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스파르타인들이 왕의 죽음을 슬퍼했다. 한편 스파르타 폴리스의 사회, 정치 구조가 일시적으로 정지 상태가 되었다. 모든 공공 업무가 중단되고, 열흘간의 국장이 선포되었다. 시민의 빚이 탕감되었고, 일부 죄수들이 사면되기도 했다. 장례식은 엄청난 소리와 함께 진행 되었다. 왕의 장례식에서는 예외적으로 여자들이 통곡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시민들이 금속 그릇들을 치거나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국왕이 서거 했다!에 뒤이어 '신왕 만세!'라고 외침으로써 장례 절차도 끝났다. 

 

 기원전 440년경 레오니다스의 장례식은 국제 관계가 미묘하게 변하는 순간에 치러졌다. 기원전 445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나이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다시 치러진 장례식은 어쩌면 페르시아에 저항해 승리를 이끌어냈던 스파르타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상기시킴으로써,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양분된 스파르타인들의 내분을 중재하고, 아테나이에 빼앗긴 주도권을 다시 찾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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