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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크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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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크의 종교개혁

 

 

 아마도 마르틴 루터가 나나크를 알았다면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은 상호적인 것이지만, 루터는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비슷한 격동기를 살았다. 나나크는 1469년에, 그리고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다. 나나크는 1539년에, 그리고 루터는 7년 뒤인 1546년에 죽었다.

 

나나크

 

그들은 서로에 대해 결코 들었던 적도 없었다. 나나크는 인도에서, 그리고 루터는 6,500킬로미터나 떨어진 독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자신들이 태어나면서 가졌던 종교를 개혁한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방식과 믿었던 세계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종교가 진리와 순수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경향이 있는지 떠올리게 된다.

 

 시크교도는 구루 나나크와 그를 계승한 아홉 명의 구루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나나크는 시크교의 창시자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신앙은 제 10대의 구루가 죽은 1708년에야 비로소 최종적인 형태를 완성한다. 구루란 말은 신의 의미를 명확하게 만들고, 신의 존재를  진정하게 만들어주는 교사라는 의미다. 구루 나나크는 죽기 전에 구루 앙가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구루 앙가드는 1552년에 죽기 전에 구루 아마르 다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런식으로 시크교의 구루 계승은 1676년에 제 10대 구루 고빈드 싱에 이르렀다.

 

 그러나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구루 고빈드 싱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제부터는 시크 공동체 내에서 신을 대신하는 구루는 두 가지 다르지만 연관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먼저 구루가 시크의 성서가 될 것이다. 구루 그라니트 사히브라고 불리는 시크의 성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상징으로서 시크 사원, 즉 구르드와라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구루의 두 번째 존재 방식은 구루 칼사 판트, 즉 순전한 방식의 구루라고 불리는 신도들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마치 기독교의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새로운 교회들처럼 , 시크교도들 역시 자신들의 믿음을 감독하기 위한 사제들의 연합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앙심이 깊은 자들은 그들과 신 사이의 중개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의 눈에는 모든 신도가 평등했다. 따라서 시크교는 인도 종교의 개신교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순수한 방식의 구루는 기독교 개혁자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만인 사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크교를 인도적인 개신교의 한 형태라고 볼수 있는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시크교의 초대 구루 나나크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자.

 

  나나크는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에서 상인 카스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힌두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는 이슬람이 점차 우세해지고 있었다. 무슬림 상인들은 8세기에 처음 인도에 도착했고, 그들의 신앙을 인도에 가져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인도는 어떤 형태의 종교에도 관용적이었다. 무슬림은 다른 종교 시스템들 사이에서 인도 아대륙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0세기가 되자 이웃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이 펀자브 지방으로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부과하는 일보다는 전리품을 실어 나르는 데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만난 다신교에 질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후에도 무슬림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나나크가 태어나던 15세기 무렵에는 무갈 제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무갈 민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의 몽골리아에서 유래했다. 그들이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였다. 나나크가 소년이 었을 때, 인도의 황제는 무슬림이었다. 그러나 힌두의 보편주의의 기운이 새로운 통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무갈 제국은 다양한 여러 종교들에 대해 관대했다.

 

 정신적인 추구에 전념했던 나나크는 선택을 해야 했다. 힌두교인가 이슬람인가? 그는 영감을 얻기 위해, 두 종교의 성지를 모두 순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서쪽으로 아라비아의 메카까지 갔다고 한다. 그가 순례를 마치고 펀자브 지방으로 돌아올 즈음, 자신이 찾고 있던 길은 힌두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비하게 이루어진 신과의 만남 이후 그는 다른 길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두 종교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것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나 종교개혁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나크는 겉으로 보여주기만 좋아하는 종교를 혐오했다. 그는 우상숭배를 권하는 상인들을 대단히 경멸하는 일신론자였다.

 

 종교가 얼마나 쉽게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이 될 수 있고, 또 영적인 사기꾼들을 동반한 부정한 돈벌이가 될 수 있는지, 그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신이 들어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나크가 직업적인 성직자가 주도하는 예배를 싫어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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