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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가 문재인대통령은 이기붕이라고 하는데 이기붕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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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 출생으로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 되지만 1953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북촌 일대에서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 지배인을 지냈다. 이무렵 2남 1녀 강희 , 강석, 강욱, 자녀를 두었다.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등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말기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채 8.15광복을 맞았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개인 비서가 된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특히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타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강해서 돈암장 출입을 금지 시켰다.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이승만은 캘리포니아대 유학 중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했었다. 그리고 거절당했었다. 보통 외국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 시에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서, 임영신이 돈암장에 들락거린게 문제가 되었던 것, 박마리아는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사실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이기붕은 의외로 꽤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 다리를 끊고 후퇴를 할 때는 "서울 시장이 된 책임으로 남겠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후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2인자로 등극했고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동자들을 공개처형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서 인기를 끌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당시의 혼탁한 정계 상황을 감안했다지만 정치깡패 이정재를 영입하고 사사오입 겨헌에 앞장서는  등 무리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자기아들 이강석을 후사가 없었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당시 법에는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로 입적 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효령대군파인 이기붕간의 관계는 문중에서도 좀 곤란한 데가 있었다.


세간에서는 아들 팔아 출세한다고 비판하는 시선도 많았다. 물론 이기붕 자신으로서는 장남은 차마 싫어서 둘째는 안 되겠냐고 했다가 이승만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했다고 한다. 이강석은 물론 부정입학 스캔들의 주인공이긴 했으나 서울 법대를 잠깐 거쳐 육사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으며 훈남에 해당하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 이기붕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낙선한 이유는 이기붕의 스펙이 떨어진 것도 있으나 당시 국민들이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조차 승리를 장담 못할 상황이었으나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사하는 바람에 무난히 당선된 것이었다. 신익희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낮았던 대통령 후보 조봉암조차 대선에서 3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후 이기붕은 장면을 제거해야겠다면서 장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기봉의 시련이 시작 되엇다. 자유당의 돌격대로써 일을 도맡아 하던 이정재가 고향인 이천에서 민의원에 출마 하려고 하자 서울에서 지지율이 바닥이라 출마가 어려웠는지, 이정재의 출마를 포기 시키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부정선거라는 최악의 병크를 터트린다. 이번에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두달여를 앞두고 급사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시 한국 나이로 86세로 21세기 기준으로도 고령이지만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고령이라, 대통령직을 임기 끝까지 무난히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통령은 대통령직 승계가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이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한 것이다.


결국 4.19혁명이 일어났고 상황이 매우 나빠지자 4월 22일 국무회의에서는 이기붕을 사퇴시키키로 합의했다. 그리고 국방장광 김정렬, 법무장관 홍진기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자신의 집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을 먹고 서대문의 자택을 빠져나와 포천시의 대한민국 육군 제 6군단사령부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식사는 못해서 미 육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말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알아듣게 설명해줘야 겨우 알아들었다고 한다.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으로부터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바았다. 이기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 후에 난 그럴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단 말을 했다. 


3.15부정선거 및 이승만의 양자 관련으로 한국 권력 2인자를 굳히면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자이자 대한민구 정치인 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는 자 

4.19혁명이 일어난지 9일째 되던 4월 28일 새벽5시 , 당시 육군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이 가족들을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했다. 향년63세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다.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니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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