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안시성주 양만춘
수나라 양제는 살수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공격하였다. 물론 그때마다 용맹한 고구려군에 의하면 패퇴하고 말았다. 내란까지 겹쳐 수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더니 결국 멸망하고 당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당나라는 처음에는 수나라의 멸망을 교훈삼아 고구려와 화친정책을 펴 양국 간에는 별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당태종이 국력을 기른 뒤 당나라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고 북방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정성을 쌓아놓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없애고 보장왕을 세우는 한편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고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그러자 고구려를 두려워한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구실 삼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길에 올랐다.
당태종은 보기 드문 영걸로서 당나라를 세우는 데도 가장 공이 컸으며 형인 건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당태종은 우선 전대에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을 보복하고 황제국으로서 연개소문이 전왕을 시해한 사건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대군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첫 싸움은 보장왕 4년 여름에 요동성을 중심으로 한 건안성,개모성,비사성, 신성 등에서 있었다. 난공불락의 요동성마저 한달 남짓한 항전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오직 안시성뿐이었다. 고구려에서도 안시성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고혜진,고연수 등을 원군으로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두 장수는 당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안시성에는 양만춘을 비롯하여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으로 항전하는 까닭에 3개원 동안 매일 6~7차례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함락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안시성옆에 높은 돈대를 쌓아 안시성의 상태를 살피려 하였다. 그러면 안시성에서는 밤에 몰래 성문을 열고 나가 돈대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래도 적병은 포기하지 않고 50만 명의 병력을 60일 동안이나 동원해 성 옆에 높다란 산을 쌓고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 봤다.
이 작전이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안시성에서는 이 산을 없애기 위해 적의 허실을 주시하고 있다가 마침내 기회를 포착하여 밤에 성문을 열고 나가 적이 쌓아놓은 산을 전부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안시성의 집요한 항전과 작전에 말려들어 지구전에 들어간 당군은 보급로가 끊긴데다 고구려군이 당군의 배후로 돌아 공격하니 아무리 불세출의 영웅이라 칭하는 당태종도 어쩔 수 없이 용감한 안시성주에게 찬사를 남기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당군을 계속 추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한 무명의 안시성주는 마침내 당태종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수나라 양제의 실패를 되씹게 만들었다. 그 후 당태종은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그때마다 고구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전후 3차에 걸친 고구려 침략으로 인하여 당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보장왕 8년에 당태종이 죽음으로써 한동안 대규모의 전쟁 도발을 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