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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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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언제 깨달았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이 아닌가 싶다. 스물여섯 살이던 1866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부임한 차이코프스키는 음악평론가 스타소프를 비롯해서 발라키레프,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큐이, 무소르그스키 등 이른바 '5인조'라 불리는 국민악파와 사귀게 된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장은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이며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이 무렵 그는 몇몇 아가씨와 사귀지만, 여자와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나를 괴롭히고 당황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베라다. 어찌하면 좋겠니?....결혼 요청이 심각해지면 그녀를 미워하게 될 것만 같다...그녀만큼 훌륭한 여자는 없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다니, 난 비열하고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몹시 괴롭구나. 내 마음을 쉬게 해다오. 이 편지는 부디 찢어버려라.

 

이것은 1868년 4월 28일 차이코프스키가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다. 그때 차이코프스키는 베라 다비도프라는 아가씨와 사귀는 중이었고 둘 사이에는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결국 차이코프스키는 결혼 대신 유럽여행을 떠나버리고 만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죄의식과 자기혐오, 세상에 알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이 차이코프스키의 내면세계를 가득 메우고 평생 그를 억누른 어두움의 실체다. 지금이야 동성애가 선천적인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죄악으로 단죄받는 것이었다. 

 

차이코프스키가 빠진 죄의식과 수치심은 시대가 안겨준 고통인 셈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번민을 일기장에 토로했다. '이것' 또는 'Z'라고 지칭하면서. 동생 모데스트에게 상의 하기도 했다. 역시 동성애자였던 모데스트는 차이코프스키 사후 형의 동성애와 관련된 편지와 일기의 상당 부분을 없애버렸다. 

 

차이코프스키는 현실에서는 이룰수 없는 여성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자신의 음악 속에서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의 작품(백조의 호수)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감상해보면 남녀의 사랑을 이처럼 고결하고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좌절된 꿈, 좌절된 사랑이 음악 속에서 완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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