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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신 ,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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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신, 천황

 

 

패전의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1946년 1월 1일 아침,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신년 담화를 발표했다. "나와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천황은 신 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공의 관념일뿐입니다."

 

 

천황의 '인간 선언'이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였다. 누가 봐도 인간인 히로히토가 온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담화는 전후 일본을 다스리게 된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가 고도의 계산 끝에 내놓은 통치 전략이었다. 그는 일본인에게 천황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맥아더는 A급 전범인 히로히토를 법정에 세우지 않고 천황제도 그대로 존속시키는 대신, 천황이 직접 육성으로 일본인들에게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선언하라고 종용했다. 

 

 

천황은 일본인들의 마음속에서 신격화된 존재, 초법적 절대자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한다면, 일본 국민의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었다가는 신으로서의 권위가 미 군정 통치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차라리 과도한 신격화를 걷어낸 후 천황의 협조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다. 

 

어찌 됐든 1946년 새해 첫날의 이 사건은 일본인들의 의식과 일본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천황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천황의 권위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필요로 했던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조작은 '국민 의무교육'과 대대적 선전을 통해 사회 구석구석으로 흡수되었고, 곧 천황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전부'가 되었다. 

 

 

천황 속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일본인은 집단과 국가에 '합일'될 수 있었다. '천황의 뜻'이라면 전쟁까지 불사할수 있었던 이유도, 목숨을 버리는 자살특공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애착과 경애심은 대단하다. 1988년 히로히토가 쓰러지자 옥체에 칼을 대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수술에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천황이 100일 넘게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일본인들은 축제를 취소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 공식 행사에서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천황의 '인간 선언' 이후 신화적 허구는 깨졌지만, 여전히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일본인 개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심점이자 매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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