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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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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내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 울린 첫 포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에스파냐 내전이었다. 내전이라고는 해도 독일, 이탈리아 ,소련등이 개입했고 전 세계에서 공화주의를 지키려는 의용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국제전이었다. 

 

 

1936년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군부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 진영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좌파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5개월 전 정교 분리와 토지 개혁을 내세워 노동자 농민의 지지를 받은 인미전선 정부가 출범했지만 기득권층인 군부, 카톨릭 교회, 왕당파, 지주, 자본가들은 권력을 순순히 내놓지 않았다. 

 

에스파냐는 프랑코파와 공화파로 완전히 갈라졌다. 여기에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복잡한 국제 역학 구도 속에서 주변 국가들이 가세했다. 파시즘 정권이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15만의 대군을 보내 프랑코를 전폭 지원했지만,확전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불간섭 원칙을 고수했다. 

 

 

소련이 공화파를 지원했지만 거리상의 이유로 한계가 있었다. 대신 전 세계의 좌파 지식인,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이 의용군 '국제여단'을 결성해 공화파 시민군과 연대해 싸웠다. 앙드레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 파블로 네루다 등 세계적 지성과 문호들도 총을 들고 에스파냐 전선으로 향했다. 

 

 

1937년 4월 독일 공군은 공화파를 지지하는 지역에 있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융단폭격해 1,600여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순전히 신무기를 시험해 볼 요량으로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게르니카를 초토화한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피카소가 이 비보를 전해 듣고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작품이 (게르니카)다. 피카소는 파시스트들이 집권한 조국에 이 걸작이 반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에스파냐가 미주화된 후 에스파냐에 전시되었다. 

 

내전은 1939년 3월 28일 프랑코 군이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면서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모두 60만 명이 희생되었다. ' 제 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세계 양심의 시험대'라고 불린 에스파냐 내전에서 세계는 일그러진 자신의 양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프랑코 정권은 무수히 많은 공화파들을 처형하고 장기 독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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