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노리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을 무렵, 중국 대륙의 지배자 청나라는 이미 덩치만 큰 '종이 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의 조류에 발맞추어 근대화를 서두르고 있을 때에도 청나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언젠가는 깨어나야 할 중세의 꿈을 꾸면서 말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기나긴 잠을 깨운 사건은 바로 '아편 전쟁' 이었다.
영국이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부터로 알려져 있다. 원래 중국은 영국에 차를 수출했고, 영국은 중국에 모직물을 주로 수출했다. '티타임'을 따로 가질 만큼 차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인지라 중국 차의 수요는 갈수록 늘어났지만, 영국산 모직물은 중국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교역이었다. 대중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고 차를 수입하는 데 필요한 은을 구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찾은 수출 대체품은 바로 아편이었다.
아편은 마약이다. 잠시의 환각으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지만, 중독되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19세기경 영국으로부터의 아편 수입이 급격히 늘어나자 청나라 민중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편이 들어오는 만큼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흘러 나갔다. 화폐인 은이 부족하니 물가가 폭등했고, 생활고가 심해지자 아편을 찾게 됐다.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과 비례해 아편 수요는 증가했고, 아편 소비가 늘어나는 만큼 다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아편굴에는 도시 빈민층이 넘쳐났고, 농민들은 농번기에도 아편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관료들과 병사들의 아편 중독도 심각해져 국가 기강도 해이해졌다. 1830년대 중국 내의 아편 중독자는 무려 200만 명을 헤아렸다. 1836년 청나라 정부는 아편을 금지하기로 했다. 그래도 영국이 몰래 아편 무역을 계속하자 1839년 임칙서를 흠차대신(황제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는 대신)으로 임명해 개항장 광저우로 파견했다.
부패한 관리들의 묵인 아래 근절되지 않고 있는 아편 거래를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강직한 임칙서는 정박해 있던 영국 상선을 기습적으로 수색해 2만 상자에 이르는 아편을 몰수했다. 1,425톤에 달하는 아편은 모두 폐기 처분되었고, 아편을 팔던 영국 상인들은 마카오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