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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국민영웅 호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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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찌민이라 하면 그저 베트남의 도시이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도시의 이름이 베트남의 통일에 앞장선 주석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럼 호찌민은 누구일까?


호찌민은 베트남의 제1대 국가주석, 유명한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며, 현대 베트남의 국부로 평가 받는 인물로써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지배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활을 한 사람이다. 


본명은 '응우옌신꿍' 호찌민은 가명이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그를 '호 아저씨'라는 애칭을 쓴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수배되어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한한 대략 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 


호찌민은 1890년 베트남 응에안성에 있는 호앙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고, 그의 가계가 객가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해 어머니가 사망 했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번민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형과 누나도 주변에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게 되는데, 때문에 호찌민의 형과 누나는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호찌민 본인도 프랑스 베트남 학교인 국학 재학 시절인 1980년 징세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잠시 민족주의자 하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 전반에 만연했던 '일본을 배우자'란 구호를 넘어서 도리어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나아가 세계를 더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간다. 그리고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청소부,웨이터,사진 수정자, 화부 등으로 일했다. 미국에 있을 당시 보스턴에 있는 빵집에서 일도 했고, 흑인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미국 영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러시아어도 능통했다. 


1917년 호찌민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18년에는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추구했다. 그리고 한국 신한 청년단에서 독립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이 가명으로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우운동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미족자결주의를 주장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애초에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정의 패전국들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가 컸고, 미국은 승전국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기에 윌슨은 무시했다. 


하노이에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예 주석궁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고 한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 주석궁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호호라는 애칭을 불러주면 미소를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은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었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화를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 했다.


                                                                                     호찌민


이렇게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 덕에 베트남에는 꽤나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큰 마찰은 없다고 한다. 호찌민도 생전에 소수 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면서 그들의 풍습에 맞는는 집에도 거주하였였다고 한다. 호찌민은 가는 곳마다 소수민족을 설득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했고 그들을 위한 간단한 신문을 만들었으며 문맹자들을 우위해 외우기 쉬운 노래를 만들어 가르쳤다. 그결과 몇년후 북쪽 지역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이 되었고 수수민족의 협조는 베트남 전쟁당시 북베트남이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무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찌민으로 개명했다. 그의 사망일일은 공교롭겓게도 독립선언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9월2일과 일치하는데 이날은 베트남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그는 전설이 되었다. 



                                                                                       호찌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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