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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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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저주

 

 

1922년 11월 이집트 제 18왕조의 12대 왕 투탕카멘이 3,200여 년에 걸친 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발굴 역사상 최대의 성과로 꼽히는 투탕카멘 왕묘 발견의 주인공은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무덤과 시신의 보존 상태는 완벽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도굴되지 않아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덕분이었다. 관을 열자 황금 마스크를 쓴 파라오의 미라가 누워 있었고, 이마 위에는 한 묶음의 화환이 놓여 있었다. 아직도 향기가 남아 있는 향료와 의류, 무기 등 진귀한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투탕카멘은 아홉 살에 즉위해 열여덟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한 이 불운한 소년 왕이 이집트 파라오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처럼 눈부신 고고학적 성과를 안겨 주었기 때문도 있지만,한동안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해 준 '저주설'의 공로도 적지 않다.

 

투탕카멘의 미라가 빛을 본 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발굴에 참가한 이들 중 13명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발굴의 재정적 후원자로 현장에 함께했던 조지 카나본 경은 고열에 시달리다 이듬해 4월에 사망했고, 무덤의 벽을 허물었던 건축가와 미라를 촬영했던 사진가도 잇따라 숨을 거두었다. '투탕카멘 저주'의 시작이었다. 

 

 

이 밖에도 무덤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잇따라 사고나 질병, 자살 등으로 뒤를 따르자 사건은 언론에까지 보도되며 화제가 되었다. 발굴되기 전의 관 위에 고대 이집트 어로 '파라오의 평안을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쓰여진 석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야기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투탕카멘의 미스터리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0년간 스무 명이 넘는 희생자 수는 투탕카멘의 저주를 인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아 보이지만, 발굴에 참여한 이가 1,500여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미미한 수다. 

 

 

발굴 직후의 연쇄적인 죽음은 무덤 속의 세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투탕카멘은 세인의 입길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미라의 두개골 뒤쪽에 함몰 흔적이 발견된 것을 두고 '왕위를 둘러싼 궁중 내권력 투쟁 과정에서 타살된 것'이라는 학설이 발표되면서, 소년 파라오는 '암살설'의 주인공으로 다시 한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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