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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영적 지도자 , 아야톨라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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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영적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

 

 

 

 

1979년 2월 이란에서 정권을 잡은 사이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는 독특한 혁명 지도자다. 당시 77세였던 그는 경건하고 청렴결백하며 엄격한 사람으로, '알라의 징표'라는 뜻의 고위 직책인 '아야톨라' 자리에 오른 이슬람 사제였다.

 

그는 모하마드 리자 샤 팔레비의 친서방 독재 정권을 전복하고 종교 정권을 세우며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이 혁명을 전 세계에 전파할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알라 외의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 이 외침이 전 세계를 뒤덮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호메이니는 1902년 테헤란에서 약 200마일 떨어진 마을에서 대사제 호메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단히 유명한 아야톨라 밑에서 교육받았다. 스승이 이란의 시아파 중심지 쿰 마을로 옮겨가자 호메이니도 그를 따라갔으며, 27세인 1925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호메이니는 1941년에 집권한 모하마드 리자 샤 팔레비 정부가 세속적이고 서구적인 것을 추구하자 이를 비난했다. 그는 곧 이슬람 가치를 추종하는 엄격한 전통주의 스승으로 평판을 얻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아야톨라가 된 호메이니는 샤 팔레비를 더욱 거세게 비난했으며, 샤는 그를 투옥했다가 1964년에 결국 터키로 추방했다.

 

호메이니는 다음 해에 이라크로 가서 시아파 마을 나자프에 살며 샤 팔레비를 반대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이 무렵 호메이니에게는 추종자가 많았다. 이란 내의 혁명 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호메이니는 추방당한 영적 지도자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실한 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샤 팔레비를 대신할 청렴한 인물 1순위가 되었다.

 

1979년 1월, 샤 팔레비가 나라 밖으로 쫓겨나자, 호메이니는 돌아와서 이란 정권을 잡고 열렬하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거의 즉시 이라크와의 전쟁이 터졌다. 호메이니는 사담 후세인의 세속적이고 범아랍 민족주의적인 자세가 이슬람의 교리와 상반된다고 생각해 이 싸움을 조장했다.

 

이에 자극받은 후세인은 1980년 가을에 공격을 개시했고, 이란은 밀려나다가 전세를 회복하여 길고 끔찍한 8년의 전쟁을 이어 갔다. 그동안 이란 인은 정신적인 지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하지만 엄청난 피해와 '도시 전쟁'으로 이란 인은 녹초가 되었고, 호메이니는 1988년 이라크의 봄 공세를 못이겨 국제 연합이 제시한 휴전 협정을 받아들였다.

 

어느덧 85세가 된 아야톨라는 이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이란 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가 되어 떠난 사람을 위해 기뻐하라.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불해이로다. 이 결정을 바아들이는 것은 독이든 성배를 마시는 것보다 더욱 치명적이다."

 

결국 급진적 이슬람 정신을 이란에 퍼뜨리겠다는 호메이니의 꿈은 실패했다.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을 전복하겠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자 이란은 국가를 재건하느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외세와 협력해야 했다.

 

여전히 사제들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더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를 볼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1년 후인 1989년 6월에 사망했다. 200만 명의 이란 인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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