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산실 아카데메이아의 건립자 플라톤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신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
명문가의 자제였던 플라톤을 철학의 깊고 넓은 세계로 안내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로 아테네 올림픽에 참여했던 젊은 귀족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친구로 혹은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사상을 이어받고 새로운 철학 세계를 구축해갔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플라톤의 아버지 아리스톤은 왕족 출신이었고, 어머니 페리크티오네 역시 정치가 솔론의 혈족이었다. 어머니 페리크티오네는 플라톤이 어렸을 때 남편과 사별한 후 페리클레스의 지지자였던 그녀의 삼촌 피릴람페스와 재혼했다.
플라톤은 집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려서부터 음악, 스포츠,미술, 희곡, 시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의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였으나 체격이 커서 '넓고 평평한 어깨"라는 의미를 지닌 플라톤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플라톤은 청년 시절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권이 몰락한 후 새로 들어선 민주정권에 실망해, 아테네의 정치 풍토에서는 양식 있는 사람이 일할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의 꿈을 버렸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는데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고 나서 플라톤은 메가라로 피신하고 몇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시칠리아섬을 방문한 그는 시라쿠사의 왕인 디오니시오스의 초빙을 받아 그곳에서 자신의 철학적 이념을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기원전 388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아카데메이아'라는 교육기관을 건립했다. 아카데메이아는 기숙사, 강의실, 박물관등을 골고루 갖춘 일종의 종합대학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약 20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아카데메이아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가 이를 폐지할때까지 약 9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카데메이아란 이름은 아카데모스란 영웅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만이 아니라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탐구를 했다. 원뿔 곡선론에 관한 연구와 같은 기원전 4세기의 중요한 수학적 작업들은 모두 ㅇ아카데메이아에서 이루어졌다. 테아이테토스는 입체기하학을 창시했으며, 에우독소스는 비례론 및 곡면체의 면적과 부피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플라톤의 부재 시에 아카데메이아의 교장 역할도 했다.
플라톤의 친구인 아르키타스는 역학을 창안했다. 플라톤의 조카로 자연사에 관한 저서들을 남긴 스페우시포스와 생물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술들처럼 수학 외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법학과 실제 법률의 제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카데메이아는 플라톤이 죽은 후에도 2세기 반 동안 지적 삶의 중심지로 남았다.
아카데메이아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시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면서 여생을 보내다 기원전 347년에 죽었다. "천한 사람들의 입으로는 찬사를 보내는 것조차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한 마디만으로도 그의 고귀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이데아론이라는 학설로 대변된다. 이는 "우주의 모든 현상 뒤에는 불변의 진리가 있으며 이것은 이데아라는 영원한 형상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은 이데아 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므로 절대적인 정의, 미,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철학은 이처럼 현상계와 이데아가 대립하는 이원론이다.
그는 철학, 과학, 정치학, 등 다방면의 저술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프로타고라스),(국가론),(법률론),(정치가론)등이 있다. 그의 정치사상은 그의 저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바람직한 정치 형태로 귀족정치를 제시했으며 스파르타적 도시국가를 이상적인 국가 형태로 보았다.
사회는 노동자층, 군인층, 철학자층으로 이루어지는데 노동자층은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여 조달하고, 군인층은 국가 안보를 담당하고, 가장 위에는 철학자들이 위치해 민중을 통치하는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철인정치사상이라고 한다.
또한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아이들을 전부 국가가 교육하고 기르며, 국가가 교육과 혼인을 통제할 것을 주장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했다. 국가의 규모는 지나치게 크지도,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의 사상은 그가 쓴 책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양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3인방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