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근대의 문을 열어준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제 122대 천황이다. 휘는 무쓰히토이며, 유소년기의 궁호는 '사치노미야'이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일본은 봉건국가에서 세계를 넘보는 근대적 열강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무쓰히토는 고메이 천황의 제2황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딸로 곤노텐지(천황의 측실 계급)인 요시코이다. 1860년에 황태자로 봉해졌으며, 1867년 1월 30일에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천연두로 급사하면서 15세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견고하게 보이는 막부체제는 내부적으로는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동인도 함대의 매튜 페리 제독을 앞세운 미국의 개국 요구에 직면해 있었다. 페리의 내항으로 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외압은 구체화되었고, 이는 비정치적이었던 천황을 정치화시켰다.
그리고 덴포 개혁이후 대두한 사쓰마번, 조슈번 등의 대형 세력이 이와 연결 되면서 막부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1867년(게이오 3년)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토막 동맹을 맺기에 이르자 약체화된 막부의 고민은 커졌다. 결국 막부는 자신들이 붕괴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돌려주겠다고 조정에 제의했다.
조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약 300여 년에 걸친 에도 막부체제는 종언을 고했다. 12월9일 , 이와쿠라 도모미등의 왕정복고파가 사쓰마번의 막부 타도파와 손을 잡고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왕정복의 대호령을 발표했다.
조정을 중심으로 사쓰마번, 도사번, 에치젠번 등이 연합한 메이지 신정권이 수립되었고 이에 대해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막부측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1868년 즉위식을 거행한 메이지 천황은 일세일원,(한 임금의 재위 동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함)을 공표하고 연호를 메이지로 정했다.
이어 1869년에는 도쿄성으로 궁성을 옮기고, 판적봉환을 시행했다.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은 일본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1870년에는 신도를 국교를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여 신도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했다.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도쿠가와 막부에 적대적이었던 번 출신의 젊은 무사들로서, 주로 내정 문제와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에 자극을 받았다. 이들은 부국강병이라는 기치 아래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민족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1873년에는 징병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통일적인 조세,화폐정책을 실시했으며 1873년 지조개정으로 주요 수입원을 확보했다.
1884년 이후에는 입헌군주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각제도, 시정촌제,부현제, 군제 등의 제정과 함께 전국에 걸친 관료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황실 재산도 마련했다. 1889년에는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진 메이지 헌법을 마련해 입헌군주국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외교적으로는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군사적, 경제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채택했다. 1911년에는 개항 이래의 목표였던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이루어 명실 공히 열강의 하나로 성장했다.
메이지 천황은 근대 격변기에 황위를 차지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천황 본인이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할 정도였다. 그러나 근대화를 몸소 실천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나 사사키 다카유키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특히 서양 교육이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게다가 내각의원들에 대해 불신하는 경향이 있어 입헌군주제가 시행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대신들의 설득이 필요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서양 복식과 음식을 즐기기도 했고,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여 전통적인 일본시가 양식으로 쓴 시 10만여 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메이지 천황은 지병이던 당뇨병이 악화되어 1912년 7월 30일 사망했고,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의 제국 육군연병장에서 대상례가 거행되었다. 이후 교토 남쪽의 후시미모모야마노미사사기로 관이 옮겨지고 9월 14일에 매장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죽음은 메이지 일본의 종언으로 인식됐다. 이런 영향으로 대상례를 전후해 많은 사람이 자결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