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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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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은 중국 중원에서 이민족의 왕조인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왕조를 다시 세우는 계기를 만든 종교적 농민 반란이다. 허베이 성 영평에서 한산동과 유복통 등이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중심 세력은 백련 및 미륵교도이다. 

 

이들은 붉은 천을 머리에 둘러 동지의 표지로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이라 하였다. 

13세기 전반 몽골 족으로 이루어진 원나라에서 한족들은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1351년 황허 강 보수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징발되면서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틈타 비밀결사단체인 백련교를 등에 업은 한산동이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 각지를 점령해나갔다. 그후 한산동이 관군에게 붙잡히자, 그의 부하 유복통이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받들어 소명왕으로 추대하고 송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동시에 원나라 타도의 격문을 띄웠다. 이를 계기로 장사성, 곽자흥 등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적은 1357년부터 1359년까지 3개 군으로 나누어 중국 각지와 주변지역의 원정에 나서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 홍건적은 채식주의 , 근검절약, 상호부조라는 종교적 계율을 지켰으며, 특히 도둑질이나 간음을 엄금하는 규율을 지켜 원정을 가는 곳마다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명확한 정치계획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휘계통도 확실하지 않고, 명령이 철저하지 못하며, 지휘 세력 간의 내분으로 인해 홍건적의 결속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결국 그들은 원군에 밀려 요동으로 이동했다가 고려 땅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홍건적의 결속력이 약해지자, 원과 한인 지주연합회가 홍건적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359년 송의 수도 변량을 함락시키고, 1363년 홍건적에 속해 있지 않은 주원장의 부장이었던 여진이 소명왕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소명왕을 구출하고 계속해서 중국 땅을 정벌해나갔다. 1366년 주원장이 홍건적의 상징이었던 소명왕을 죽이고 스스로 홍건적의 무장임을 부정하면서 홍건적의 난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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