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사랑하는 왕자 쇼토쿠 태자
일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인물 쇼토쿠 태자. 그는 일본 불교의 부흥을 이끌었고, 최최의 관료 제도인 12관위계제를 만들었으며,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17개조의 헌법을 만드는 등 고대 일본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사람이다. 또한 수나라에 견수사등을 파견하여 일본의 대외 관계를 정립하는 등 일본의 국가체계를 잡아나갔다.
쇼토쿠 태자는 소가 가문 출신으로 574년 요메이 천황의 둘째 황자로 태어났다. 당시 일본은 중국으로 부터 건너온 불교를 처음으로 공식 승인했고(538년), 일본 내에서는 불교와 함께 건너온 발전된 외국 문명을 배우려는 이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건축 기술, 토지를 개량하는 신기술, 의료 기술 등이 불교와 함께 일본에 전해졌고 그런 선진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교를 옹호하던 소가 가문이 새로운 절을 세울 때마다 일본 전역에 돌림병이 도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소가 가문의 불교옹호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가문이 생겼다. 배불파인 모노노베 가문이었다.
불교를 옹호하는 소가파와 불교를 배척하는 모노노베파는 조정 내에서도 극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왕중에 비다쓰 천황의 시대가 끝나고 쇼토쿠 태자의 아버지인 요메이 천황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황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암투의 장본인은 일본 고대신을 숭배하는 '신도의 모노노베 모리야와 불교를 숭배하는 소가파의 소가노 우마코였다. 일본의 호족 대부분이 소가파를 응원했다. 그리고 쇼토쿠 태자 역시 소가파의 편에 서서 전투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소가파가 대승을 거두고 모노노베파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다음 천황은 스순천황이었다.
그러나 스순 천황은 즉위하자마자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천황가에서 천황을 계속 배출하는 것은 신도 사상을 그 사상적 근거로 삼고 있는데 스순 왕조 자체가 이 신도 사상을 배척하고 불교를 숭상하는 무리에 의해 세워진 왕조라는 것이 문제였다.
스순 천황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리고 결국 천황의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배불정책을 퍼나가기 시작했다. 그를 천황의 자리에 올려놓은 소가씨 일파에게는 배반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를 용서할 소가씨 일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천황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막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5년 후 스순 천황은 소가노 일파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쇼토쿠 태자의 숙모인 스이코 천황이 즉위했다.
그리고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을 도와 섭정을 하게 되었다. 비로소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할 천황가의 젊은 영웅이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 것이다. 태자는 우선 12관위계제를 시행했다. 이는 가문이나 문벌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제도로 일본 최초의 관료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귀족이나 호족의 자제라면 별다른 능력이 없더라도 관료로 등용될 수 있었다. 이런 불합리함을 극복하고 유능한 관리 채용을 위해 쇼토쿠 태자는 효과적인 12관위계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 제도로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실력에 의해 얼마든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최초의 헌법인 17개조의 헌법을 재정했다. 이 헌법은 관리들의 마음가짐이나 누구나 지켜야할 도덕 등을 제정해놓은 것인데 현대의 헌법과는 성격상 다른 면이 많다. 그러나 제1조인 "화합은 고귀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대화로 풀어야 한다. " 라는 말은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는 또 수나라에 견수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수나라 양제에게 보낸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고하노라"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는 국서의 내용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수양제는 이 국서를 보고 크게 노했지만 당시 고구려정벌로 인해 고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 정벌을 단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12명의 사신을 보내왔다.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사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동등한 국가로서의 외교노선을 구축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화가와 장인 ,관료 수십 명을 데려오는 한편 중국의 역법을 채택하고 도로망을 확립했으며 사비를 털어 호류사를 비롯한 많은 불교사원을 건축했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 발전에도 큰 몫을 했다. 그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혜자라는 승려를 통해 불경을 공부했으며 사원의 건축이나 불상의 제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춘 불교학의 최고 권위자였다.
쇼토쿠 태자는 622년 타계했으며 불교 진흥에 대한 공헌을 인전받아 사후에 부처로 추앙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