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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에서 황제까지 명태조 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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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에서 황제까지 명태조 주원장

 

 

 

명나라 초대 황제 태조는 역대 중국 황제 가운데 가장 미천한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굶주림 때문에 한때는 억지로 승려생활까지 했던 그는 홍건적, 이라 불리던 백련교도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후 새로운 왕조를 열어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생활은 굴욕과 가난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주원장의 부친 주세진은 아내와 4남매를 데리고 그럭저럭 연명하는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1344년, 주원장이 17세가 되었을 때 돌림병으로 가족 모두가 횡사하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궁여지책으로 부근에 있던 (황각사)라는 절로 들어가 억지로 탁발승이 되었다. 그런데 원치 않는 탁발승 생활을 마감하게 해준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백련교도의 난이다. 

 

당시는 원나라 말기로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다 황허의 잦은 범람으로 일반 백성들의 궁핍함은 처절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때 백성들의 원망을 모아 새로운 교도들이 일어서니, 이들이 바로 한산둥을 중심으로 한 백련교도들이었다. 백련교도들은 원나라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했는데 붉은 두건을 두른다하여 '홍건적'이라 불리었으며, 이들은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다시 세우자" 는 구호를 외쳤다. 

 

백련교도 일파 가운데 안휘에서 봉기한 곽자흥의 세력이 가장 막강했다. 그리고 이 곽자흥의 무리에 후에 명의 태조가 되는 주원장이 가담한 것이다. 25세에 탁발승 생활을 청산하고 곽자흥의 수하로 들어간 그는 부장이란 지위에 있으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고 점차 많은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다. 곽자흥의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수하에 있는 부하들도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평소 부하들을 극진히 보살피는 그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곽자흥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이 갈등은 주원장이 곽자흥의 양딸과 결혼하며 해소되었다. 

 

곽자흥 사후 주원장의 세력은 더욱 막가애지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 동부 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후 양쯔 강 유역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알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원장의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그들에게 중국어의 기본을 배웠고, 중국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더욱 의미 깊은 일은 그가 통치의 원칙을 배우고, 군사조직과 함께 효과적인 지방해정 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1364년, 스스로를 "무왕"이라 칭한 주원장은 원나라 토벌을 목표로 북벌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송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한림아, 즉 "소명왕"을 섬겼다. 

 

그러나 소명왕은 1367년 주원장의 사주를 받은 부하로 인해 양쯔 강에 빠져 죽었다. 같은해에 스스로를 "오왕"이라 칭하던 장사성 역시 붙잡혀 자결하면서 그의 정적들은 모두 소탕되었다. 그리하여 1368년 국호를 대명, 연호를 홍무라 하고 황제로 등극하여 "홍무제"가 되었다. 

 

홍무제는 원나라 내부에서 분규가 일어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북벌을 단행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주원장의 군대를 본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는 대도를 버리고 상도로 도망쳤다. 

 

이로써 중원의 영웅이었던 칭기즈 칸이 몽골제국을 통일하여 중국 땅에 몽골 족의 국가인 원나라를 건국한 이후 15대 만에 원은 멸망했다. 중국 본래의 주인이었던 한족이 다시 중원을 차지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잔존 세력들이 쉽게 토벌된 것은 아니었다. 원나라 일족들은 만주와 산서, 운남 등에서 끈질기게 명태조 주원장을 괴롭혔다. 이를 참지 못한 주원장은 수하에 데리고 있던 장수인 서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북벌을 단행케 했다. 그리고 원정 결과 순제는 죽고 그의 아들 역시 끝까지 저항하다 끝내 토벌되고 말았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열고 태조에 오른 지 무려 21년 만에야 마무리된 끝질긴 투쟁이었다.

 

명나라는 '중화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건국된 나라였으므로 태조는 집권하자마자 복고정책을 실시했다. 주자의 가르침을 털리 유포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자손을 가르치며, 자신을 지키고, 분수를 알며,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육우를 선포했으며 과거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당나라를 본받아 대명률과 대명령을 선포했다. 

 

중앙관제는 중서성을 폐지하여 황제의 견제세력이었던 승상의 존재를 아예 없앴고, 종전의 6부제도를 부활시켜 정치를 분담하게 한 후 황제에게 직속시켰으며, 도찰원을 두어 이 역시 황제의 직속으로 두었다. 한마디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잡아나간 것이다. 그리고 지방을 모두 13성으로 나누어 각 성에는 포정사와 안찰사를 두었다. 

 

그러나 어렵게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에게 인간으로서 커다란 비애가 시작되었다. 바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거이다. 스스로 수많은 배신과 역모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일까.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수많은 군신들 한명,한명에게 주원장은 끝없는 의심의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그런 의심증은 끝내 커다란 불행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까지 많은 공을 세웠던 공신들을 차례로 주살해나갔다. 그 옛날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주원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모반 혐의로 재상인 호유용이 숙청되었고, 이 사건과 연루되어 1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뿐만 아니라 10년 후에도 호유용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건국공신이자 주원장의 친구였던 이선량과 그의 일족들을 몰살시켰다. 

 

북방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장군 남옥과 이 사건에 연루된 자 1만 5,000명잉 다시 처형되었다. '남옥의 대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해 새로운 왕국을 열었건만 공신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일가족 몰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걸승이라는 미천한 출신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명태조 주원장. 그러나 사람을 믿지 못하고 끝없는 의심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의 말년은 사랑하는 부인 마황후가 죽고 이어 태자 "표" 마저 젊은 나이로 아깝게 죽자 슬픔과 비통속에서 마감되었다. 

 

1398년, 그는 황손인 윤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지식과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던 넷째 아들 체가 조카인 윤문의 왕위를 찬탈하고 영락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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