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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의 태두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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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의 태두 주자

 

 

주자가 인류 역사에 공헌한 일 중 으뜸을 꼽으라면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주자학(朱子學)을 완성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공자 이후 이어져 내려오는 유학은 훈고학 (訓古學 ) 이라 하여 경전에 주석을 붙이는 생명력없는 학문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런 훈고학의 한계를 넘어서 개인 수양으로서의 학문, 천하를 다스리는 기틀이 되는 학문, 인간 본성을 고민하는 학문으로 재탄생시킨 것이 주자다.

 

 

송학, 이학, 도학, 성리학으로도 불리는 주자학은 젊은 지식층이 있었던 사대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송대 이후 중국 사상계의 기초가 되면서 외국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청대까지 그생명을 이어나갔으며, 한국과 일본 등의 인접 국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주자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그는 다섯 살 때 (효경)을 깨우친 신동으로 유명했다. 당시 대과 급제자들의 나이는 평균 35세였으나 18세에 급제하여 주의 사람을 놀라게 했다. 

 

첫 번째 임지에 부임하기 전 그는 유학자인 이동(李侗)을 찾아갔다.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 평가받는 이동은 주희의 사상이 구축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까지 약 천 년간 실추되어 있던 유학의 위치는 11세기 성리학자들이 도교와 불교 철학에 맞서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면서 학문적, 사상적 우위성을 회복 했다. 

 

이동은 이런 11세기 성리학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던 사람으로 그의 영향으로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송나라를 위협하던 금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를 극복해나갈 방안으로 '격물치지'수신제가'등을 주장해 황제였던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공직은 거부했다. 당시의 파당정치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상적 스승은 정호와 정이, 주돈이, 장재였다. 그는 맹자가 죽은 후 사라진(道)의 전통을 이 네 사람의 사상을 드러냈다. 이(집주)들은 중국, 한국, 일본 등 유교문화권의 국가들의 지식인 사회의 큰 영향을 미쳤다. 

 

1188년 주희는 (대학) 을 통해 황제의 덕성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1989년 부터 죽을때까지 이책의 주석서를 쓰며 자신의 사상을 보완했다. 

주자는 영종, 의 즉위 후 시강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력가였던 한탁주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그의 미움을 사 파직당했고, 그 이후 계속해서 탄압을 받아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한탁주는 주자학을 '위학'으로 매도하고 주희의 사상과 저서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모여드는 사람들 역시 탄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탁주는 결국 주희의 수제자 채원정을 필두로 주자학파 59인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 이 사건이 '경원당화'이다. 

 

제자들이 옥고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주희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며 1200년 3월 9일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한탁주는 금나라와의 무모한 전쟁을 시도하다가 대패하였고, 결국 금은 강화조건으로 그의 목을 요구했다. 

한탁주가 죽자 그가 억압하던 주자학에 대한 탄압도 중지되었고, 주희는 국가로부터 '문공'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우리가 주희를 주문공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또한 이종대에 와서는 태사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다시 신국공으로 추서 되었다. 

주자는 (가례)(태극도설)(소학근사록)(역본의)(사서집주)등 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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