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사건에 대해서
톈안먼 사건은 1989년 6월 4일,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했다고 하지만,비공식 집계로는 사망자, 5,000여 명, 부상자 3만여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후 중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 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만 4,550명이었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 시행 이후 누적되어온 문제점이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무렵 화궈펑을 축출하고 정권을 다시 잡게 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노선을 주축으로 삼아 서구의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경제적 자유와 개방의 폭을 과감히 넓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개혁에 비해 정치개혁은 상대적으로 부진을 면하지 못했고, 권력의 집중화로 인해 경제개혁마저도 결국 부정부패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다. 전반적인 소득은 증가했으나 특권층의 부패와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시민들은 점차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급진개혁주의자로 분류되던 후야오방이 198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후야오방은 한때 덩샤오핑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중 한 사람이었으나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 내 민주화 등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치 개혁은 당 내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후야오방은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 대학 학생들은 보수파를 비난하기 시작하여, 4월 17일에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기폭제로 10여 개 이상의 대학교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집결하여 후야오방의 당 총서기 해임 이유를 밝히고 명예회복을 해줄 것을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베이다오를 주축으로 한 47명의 저명한 학자들도 학생운동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다. 4월 26일에 덩샤오핑은 리펑 총리에게 시위대를 강경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인민일보) 는 이 날짜의 사설을 통해 학생 시위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했다.
5월 13일부터, 2,000여 명의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5월 18일에는 시민과 학생 100만여 명이 단식농성 지지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국은 19일 밤에 전격적으로 베이징에 군대를 투입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 베이징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당 내 보수파는 개혁파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시위는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상하이는 물론 선양, 창춘,창사 등에서 전국적인 시위가 잇달았고, 결국 6월 4일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군의 대학살로 이어졌다. 중국군은 시위대를 무차별 살해함으로써 민주화 시위를 종식시켰다.
6월 9일 덩샤오핑은 베이징 일대에 출동한 군징휘관들을 접견하여 '반혁명 폭동'이 진압되었다고 선언했고, 톈안먼사건은 강경보수파의 승리에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
2005년 11월 18일 '후야오방 기념대회'를 시점으로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을 조심스레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중국에서 톈안먼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는 곧 톄안먼사건의 재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톄안먼 광장에는 중국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