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들이 입혀준 용포 송태조 조광윤
907년 당이 멸망한 후 960년 송나라가 건국될때까지 중국은 대혼란을 맞게 된다. 5대, 즉 후량, 후주,후당,후진,후한과 10국, 즉 전촉, 후촉, 오, 남당, 오월,민,형남,초, 남한, 북한으로 중국 영토가 쪼개져 5대10국으로 일컬어지는 군웅할거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이들 나라는 당말기 각 지방에서 득세한 절도사들이 독립하여 세운 나라였다.
중국 역사상 암흑기로 불리는 이 시기는 후주의 한 절도사에 의해 마감되는데, 그가 바로 조광윤이다. 그는 하북성 고안현 사람으로 부친은 후당의 금군 장관이었던 조홍은이고 모친은 두씨이다. 조광윤의 가문은 3대조부터 군관으로 공을 쌓아온 집안이었다.
스무 살 무렵 조광윤은 후주의 왕 곽위의 양아들 세종의 군대에 들어갔다. 954년 왕위에 오른 세종은 중국 남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광윤은 이 전투의 공으로 후주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세종은 3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승하하면서 조광윤에게 일곱 살밖에 안 된 황태자를 잘 보필해주도록 당부했고, 조광윤은 그의 앞에서 약속을 지킬 것임을 맹세했다. 그러나 어린 황제 공제가 등극한 후주는 거란족의 침입을 받는 등 일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조광윤의 부하들은 이런 전란의 시대에 어린 군주를 모시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960년, 조광윤의 군대는 요나라의 침공에 맞서 수도인 개봉 부근의 진교역에 진을 쳤다. 그날 새벽, 조광윤의 부하들과 동생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가 되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황포를 그의 몸에 두르고 머리를 조아렸다. 조광윤이 애초에 황위에 오를 뜻이 있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부하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개봉으로 돌아가 어린 공제에게서 황위를 양위받고 송을 건국했다. 이를'진교병변'이라고 한다. 당시 조광윤의 나이는 33세였다.
송태조가 된 조광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철저한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절도사들의 세력을 꺾어놓는 일이었다. 절도사의 세력이 꺾이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 반란이 일어나 송을 위협할지 모를 일이었다.
송태조는 한 사람의 절도사가 한 주만을 다스리게 하고, 나머지 주는 중앙에서 파견한 문인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했다. 절도사가 죽거나 자리를 비우면 무인이 아닌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는 문인관료들을 파견하여 점차 둥앙집권적 군주독재 체제를 완성해나갔다. 이러한 태조의 문치주의는 절도사의 세력을 흩뜨려 놓는다는 본래 의도에는 적중했으나 송 왕조 전체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와 훗날 송이 멸망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태조는 과거제도도 개혁했다. 그의 목표는 혈연이나 정실보다는 실력이 입증된 재능에 바탕을 둔 관료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963년, 태조는 추천으로 신임 관리를 등용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과거시험위원을 자신들의 후견인으로 예우하는 관습을 금지했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합격자 선정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기색이 있으면 재시험을 치르도록했다. 행형제도도 개혁했다. 관리들의 부패와 태만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염전과 주조의 국가 통제권을 위반한 사례에 대해서는 처벌을 감해주었다. 또 사형 집행은 궁중에서 사전 검토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했다.
태조의 초기 시책들은 대부분 궁핍한 평민들의 경제 사정을 개선시키고 조세 부담을 경감하는 것들이었다.
태조의 시책에는 인자함과 인간적인 정조가 스며 있었다. 이는 유교적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패배한 적장에게 늘 관용을 베풀었고, 후주의 추종 세력들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부장들에게는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피해를 입히지 말라고 거듭 경고 했다.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 중에 이런 일이 있다. 어느 날 태조가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중에 왕저라는 한림이 있었다. 그는 원래 후주의 신하였는데 술에 취하자 예 주군을 떠올리고는 여러 사람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렸으나 태조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쉬게 해주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나 왕저는 병풍 뒤에서 옛 주군을 생각하고 대성통곡을 한 후에야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그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어떤 사람이 왕저가 세종을 그리워하며 대성통곡을 하였으니 이는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조가 말했다. "세종 때 나는 그와 같은 후주의 신하였고, 그의 성격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일개 서생이고, 옛 주인을 위해 곡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두라." 후주를 무너뜨리고 황위에 오른 사람치고는 대단히 대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조는 자신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말하며 위험을 거리끼지 않았다. 변장을 하고 암행을 나가 직접 백성들을 살피기도 했으며, 암살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면에서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후덕한 인품을 가졌으며 국민 복지에 힘썼던 황제였다.
태조는 나라가 안정되자 남진정책을 펴 형남, 후촉,남한 등을 멸망시켰으나 천하통일의 위업을 목전에 두고 976년 49세의 나이에 병사했다. 그의 꿈은 훗날 동생인 태종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