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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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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미국의 이민자로 당대에 자수성가하여 재벌이 된 입지전적 인물 카네기. 그는 1835년, 스코틀랜드의 덤펌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수동식 직조기로 가내공장을 운영했는데, 증기식 직조기가 도입되면서 하루아침에 생계가 어려워 졌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카네기 일가는 1848년에 고향을 떠나 이민선에 몸을 실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는 친척이 사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인근에 정착했다. 당시 13세였던 앤드루는 주급 1달러 20센트를 받는 면직물 공장의 공원으로 시작했지만 43세 때인 1878년에는 미국 최대의 강철공장을 설립한 백만장자 '강철왕'에 등극해 있었다. 

 

카네기가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까닭은 미국에서 강철의 대량 제조 및 유통을 실현 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하여 당대에 자수성가로 성공했는가는 차지하고, 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악덕 자본가'와 '자선 사업가'로 상반 된다. 

 

 

악덕 자본가는 '홈스테드 학살사건' 이 주원인이었다. 1982년 6월에 카네기의 소유인 홈스테드 제강소에서 임금 협상 문제로 노사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카네기의 동업자이며 회사의 2인자였던 헨리 클레이 프릭은 공장 폐쇄라는 일방적인 조치를 감행했고,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며 사태가 악화되었다. 

 

프릭은 공장을 탈환하기 위해 경비용역 업체인 핑커턴회사 소속의 사설경비원을 수배 명을 투입했다. 그 와중에 경비원과 노동자 간에 충돌이 빚어져 1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주 방위군이 투입되어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노동탄압 사건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사태를 수수 방관했다는 비난이 빗발치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정직한 기업가이며 노동자의 벗으로 행세했던 카네기의 이미지에는 타격이 불가피했다. 

 

그런가 하면 자선 사업가로 추앙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실적이 있다. 카네기는 사업 확장에 분주했던 33세 때 은퇴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35세에 은퇴하고 생활비 연 5만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수입은 모두 자선 사업에 쓰겠다는 계획이었다. 실제 그의 은퇴는 계획보다 30년이 늦은 1901년에야 이루어졌다. 

 

 

카네기는 자선사업을 관장하 기구를 조직했다. 1902년 카네기협회,1905년 카네기교육진흥재단, 1910년 카네기국제평화재단,1911년 카네기재단이 설립된다. 카네기의 수많은 자선사업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도서관 건립이었다. 1881년에 카네기의 고향 던펌린을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2,500개 이상의 도서관이 세워졌다. 1900년에는 세계적인 공연장으로 유명한 카네기홀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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