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 산 수지
아웅 산 수지는 1945년 '버마 독립의 아버지 '인 아웅 산 장군의 딸로 태어 났지만 그녀가 두 살 때 아버지는 정적에게 암살을 당했다. 1960년 어머니가 인도 대사로 임명되자 함께 인도에서 생활을 하다가, 1964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후 유엔 직원 등의 일을 거쳐 1972년 영국인 남성 마이클 앨리스와 결혼한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마이클은 그 뒤 옥스퍼드 대학교를 거점으로 티베트와 부탄, 히말라야의 연구자로 대성한다. 아웅 산 수지는 마이클과의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고, 주부로서 육아에 쫓기면서 대학에서 연구를 재개해 버마문학 등을 테마로 한 연구논문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러던 1988년, 어머니가 위독해 병간호를 위해 영국에서 귀국한 후,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학생들이 참혹하게 탄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조국의 현실을 목격한 아웅 산 수지는 민중들의 부탁을 받고 일어선다.
쉐다곤 파고다 집회에 모인 50만 명의 청중 앞에서 '공포로부터의 자유'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민주화 투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연설에서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의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했다.
그녀는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족민주동맹NLD'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그녀가 주도한 민주화운동은 독재자 네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지는 1989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미얀마 군사 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했다. 당시 수지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그녀의 인기에 힙입어 총선 결과는 그녀가 이끄는 민족 민주동맹이 82퍼센트의 지지로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시켰다.
1991년 수지는 민주화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평화상 수상식에는 그녀가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그녀는 1989년 이후 몇 년의 휴지기를 포함해 2010년 석방에 이르기까지 총 15년을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왔다. 그리고 2010년 11월 13일,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아웅 산 수지는 2012년 4월 1일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미주동맹도 재보선 대상 45석 가운ㄷ 4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