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예술을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운동의 창시자'로서' 로서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또 '조선의 벗'으로 불리는 예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 그는 1889년 도쿄에서 해군소장인 아버지 야나기 나라요시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군부 수로국의 초대 국장과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고, 외조부는 해군 대장과 해군 장관을 역임하는 등 야나기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자랐다.
그는 일곱 살에 명문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 중등과와 고등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재학 중 친구들과 함께 인도주의를 표방한 문예잡지(시라카바)를 창간했다.
1913년 도쿄 제국 대학교를 졸업, 유럽 유학 후인 1919년 도요 대학교의 교수를 시작으로 메이지 대학교 교수를 역임, 동양 미술국제연구회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도쿄에 민속예술관을 설립했으며, 한국 민속 예술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우리 민족 예술품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 독립을 부르짓는 3 ·1 운동이 발발하면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되고 문화가 파괴되는 것에 크게 분노했고 늘 강자에게 억압을 당하는 조선의 역사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마침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달래려는 심사로 쓴 조선에 대한 첫 글인 '조선인을 생각한다'가 1920년 4월 12일 부터 18일 까지 (동아일보)에 한글로 번역문이 연재되고 뒤이어서 19일부터 20일까지 유명한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 또 (동아일보)에 연재 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반항하는 그들보다도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 어떠한 경우든 피를 보는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압제로써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거듭해서도 안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참된 평화와 우정이 형성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으며, 그 어디에도 없다.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조선인을 생각 한다'중에서)
또한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망동으로 조선의 예술이 담긴 건축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음을 애통해했다. 마침내 광화문을 헐어버리려 하는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만행에 대하여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써서 항의문처럼 공표한다.
'오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여라,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너의 왕국의 강력한 섭정대원군이 불굴의 의지로서, 왕궁을 지키고자 남쪽으로 명당자리에 너의 주춧돌을 굳게 다졌다. 여기에 조선이 있노라 자랑하듯이, 으리으리한 여러 건축들이 전면 좌우에 이어지고, 광대한 수도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여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멀리 호응하고, 북은 백악으로 돌리고 남은 남산에 맞서 황문은 그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차지했다. '
'조선의 벗' 야나기 무네요시는 1984년 한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