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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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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동양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인도의 시성'으로 잘 알려진 사상가이자 시인,소설가, 작곡가 , 교육자였던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그는 1861년 벵골 명문가의 '위대한 성자'라고 불리는 데벤드 라나트의 열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타고난 자연인이었던 타고르는 영국식의 주입 교육에 적응을 못해 세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녔지만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타고르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인도의 각지를 여행하며 전기, 역사, 천문학, 현대 과학, 산스크리트어를 섭렵했고, 특히 고대 인도의 시인 카리다사의 시를 연구했다. 

 

그는 일찍 시를 쓰기 시작했고, 열여섯 살때 첫 시집 (들꽃)을 내었으며 다음해인 1877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거기서도 학교생활을 적응을 못해 졸업장을 못 받았지만 타고르의 문학적 성장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런던 체재 중 서양의 고전문학이나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작품을 가까이하는 한편 유럽의 음악을 듣고 배우고 익혔다.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된 타고르는 귀국후 벵골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또 그 대부분을 직접 영역하기도 했다. 1891년 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의 영지를 관리하면서 접하게 된 농촌생활이 작품에 현실감을 더하고 단편 소설들을 집필하는 계기가 된다. 

 

1880년 시집 (아침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예술적 기초를 확립해 문단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1882년에 출판한 (저녁의 노래)는 타고르의 기념비적 시집이 됐다. 

 

1901년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워 특수교육을 실시했고,문학작품 활동으로 번 돈 대부분을 학교에 기부했다.이 학교가 오늘날 비슈바바라티 대학교가 되었다. 

 

1910년에 뱅골어로 출간되었던 시집 (기탄잘리) 를 직접 영역하여 1912년 영국에서 출판했다. 이 작품은 유럽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1913년 (기탄잘리) 로 동양인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15년 영국의 기사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암라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1920년부터 1930년경에 이르기까지 그는 미국,유럽 그리고 극동지역을 여행하면서 광범위한 강연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과 뉴욕 등지의 유명 화랑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만큼 다양한 장르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50년 1월 24일 독립된 인도 의회는 타고 르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인도의 국가로 채택했다.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에게 큰 감동과 위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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